나의 여행의 끝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번이 가장 힘든 여행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실재로 여행을 7일 이상 단축하려고 항공권변경을 시도했지만 좌석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나빴다. 충분히 예상한 날씨였고, 각오도 했건만 견디기 어려웠다.
귀국을 앞당기려고 했던 것은, 일기예보에 1주일간 일조시수가 단 2시간밖에 되지 않아서였다.
나처럼 자연을 보는 觀光은 빛을 보는 것인데,
이런 나쁜 날씨에 자전거라이딩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6월 13일부터 6월 30일까지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날이 없었고,
맑은 날씨라 할만한 날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 기상도 있었다. 7월 1일부터는 전혀
아이슬란드 날씨가 아니어서 대부분 맑은 날씨였다.
현지인도 정상적 날씨가 아니라고 했다. 한국에는 물난리가 났다고 하니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상이 발생하는 모양이다.
날씨가 맑다고 해서 자전거타기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자전거 타기가 겁이 났다.
기온이 낮은 것도 자전거타기가 싫어졌던 원인이다.
최저 5도, 최고 16도 정도였는데, 바람이 강해서 체감온도가 영하 1도였던 날도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여행물가가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시 놀랄만 했다.
우중에 텐트치기가 싫어서 허름한 게스터하우스에 들었는데 29만원이었다.
대체로 족히 한국의 2~4배의 물가였다.
자연경관은 어떠했는가?
아이슬란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특이한 지형이라
보통의 관광객이라면 무척 매력적일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아이슬란드와 유사한 모습을 남아메리카의 아타카마 사막,
북스코틀랜드, 노르웨이, 알래스카, 파미르고원 등지에서
이미 보았기 때문에 상대적인 매력은 덜했다.
내가 본 아이슬란드의 꽃은 55km 트레일의 란다만날라우가 트레킹이있다.
특히 아름다웠던 것은 흰구름과 어우러진 아이슬란드의 푸른 하늘이었다.
그것은 오염물질이라고는 전무한 순수한 공기가 만들어내는 빛의 산란이었다.
산업화 이전에는 세계 어디서나 이런 하늘 밑에서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물질문명의 발달이 과연 인간의 행복에 얼마만큼이나 긍정적인지 모르겠다.
아이슬란드는 남한 정도의 국토에 인구는 불과 34만명 정도이며,
수도 레이캬비크에 12만명이 거주하며 그 근교까지 합하면 국민이 반이 수도에 거주하는 셈이다.
인구밀도는 한국이 509명/km²인데, 아이슬란드는 겨우 3명/km²에 불과하다.
1인당 GDP는 $6만8천달러인데, 관광업이 GDP의 근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외 수산업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목초지가 많은 것을 보면 축산업도 비중이 작지 않을 것 같다.
에너지는 수력발전과 지열만 이용해도 남는다고 한다.
여행자의 눈에는 아이슬란드는 전체 인구수보다 관광객이 더 많을 것 같아 보인다.
아마도 특이한 지형 때문인 것 같은데, 나로서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여행지이다.
특히 자전거여행지는 아니다. 좋지 못한 기상상태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흐린날씨, 비, 바람, 추위 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렌트카나 캠핑카를 렌트해서 10일 정도의 여행을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고 달리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관광객을 감동케 할만한 풍광을 자랑할만한 곳도 몇군데 되어보이지 않는다.
나로서는 빙하호수 요쿠살론 정도와, 굴포스, 셀포스, 데티포스와 같은 볼만한 폭포가 전부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이과수와 미국의 나이애가라를 본 나로서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또 한가지 아이슬란드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은 지열지대가 있지만,
미국의 옐로스톤과 비교하면 대학원생과 초등학생의 수준 차이다.
나의 악처 클래식기타를 등 뒤로 하고 아이슬란드에 갔더니 악천후를 만나서 고생한 꼴이다.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어도 편안히 사는 법을 터득 못한 것일까.
그렇지만 편안히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제 어쩔수없이 악처 클래식기타도 사랑해야겠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힘들다, 팔자소관인가.
어디 그뿐인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다 힘든만큼 내 인생이 힘들다.
덕분에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평안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황제가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가장 평온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많은 화가들이 고요한 호수면에서 노뉘는 물새들을 그려서 받혔는데
반해서 어느 화가는 새찬 물보라가 떨어지는 폭포 안쪽에 둥지를 틀고서
물에 젖은 머리로 앉아 있는 새 한마리를 그려냈고 그가 상금을 챙겼다.
힘든 여행을 마치고 귀국을 한 나는 바로 그 새다.
P.S
이번 여행에서 매우 위험한 자전거주행사고가 일어날 뻔했다.
내가 자전거페달의 클릿을 잘못 부착한 것이 원인이었다.
부착했던 왼쪽발 클릿의 볼트가 풀려 달아나서 트레킹화로 바꿔 신었다.
내리막길에 고속으로 주행하다가 갑작스런 돌바람이 불자
오른쪽발은 클릿으로 고정되어 있고, 왼쪽발은 페달에서 미끌어져 자전거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경찰이 달려오고 엠불런스까지 달려왔다.
나는 잠시 정신이 나가고 말았다.
내가 왜 신발을 짝째기를 신고 있지? 내가 지금 어디에 왔는거지?
아이슬란드에 와 있는 것 같은데, 아이슬란드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발끈이 끊어지고, 왼쪽 안경알이 달아났다.
얼굴에 찰과상이 2군데 생겼고, 몸에는 상처가 4군데 찍혔다.
큰 부담이 되는 부상이 아니었으나 왼쪽 등의 윗쪽에 심한 통증이 발생했다.
특히, 텐트내에서 들어눕거나 일어날 때, 몸을 좌우로 돌릴 때는 비명이 나올만큼 통증이 심했다.
이 통증은 귀국할 때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텐트내 생활을 매우 불편케 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이상 자전거여행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정도로 끝난 것은 행운을 넘어서 천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이 행운과 불행은 함깨 다니니 아무것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축복이다. 그래서
오쇼 라즈니쉬는 죽음, 그것은 가장 큰 거짓말이라고 했다.
죽음은 사실상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