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25

퇴임사

나는 나이 54세가 되든 해, 2006도에 학교를 퇴임하였다. 나는 그 자리가 퇴임자들을 위한 자리인 줄도 모르고 참석하였으므로 아무런 퇴임사를 준비하지 않은 채 단상에 섰다.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의례적인 죽은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 한! 사람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는 한! 명예퇴임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학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젊었을 때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은 바로 그 행복과 자유였습니다. 나는 29세가 되든 해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하면서 비행기 창밖으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내던져 버..

단상 2023.12.14

행복

행복은 고무줄 당기기이다. 행복은 추구할수록 멀어지고, 내버려두면 따라온다. 그래서 행복은 쫓아갈수록 달아나는 파랑새라고 한 것이다. 행복은 명소시가 아니라 암소시이다. 그래서 행복에 눈의 촛점을 맞추면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알고보면 당의를 입은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도, 노자도, 예수도 행복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행복

행복하려면 성공보다는 인성과 성품이 좋아야 한다. 아무리 홀로 성공한다해도, 그것은 그 순간의 기쁨 뿐이고 행복감과는 거리가 멀다. 비유를 들자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도 홀로 먹는다면 포만감은 느낄지언정 행복감은 기대하기 어렵다. 음식은 가족이나 몇몇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먹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것은 행복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사람이라면 행복감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수십명이 단체로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 또한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제아무리 깨달은 사람이라할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홀로 행복할 수는 없다. 나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사람이라 행복에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나의 사전에는 행복은 없다.

행복론

행복이란 자신의 정신적 성장의 그림자이다. 불행이란 자신의 정신적 퇴락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을 논한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논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이 행복론을 설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공염불이었다. 사람들이 행복은 자신의 내면에 있다고 하는 말은, 바로 정신적으로 성장한 자신의 내면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행복

행복을 따라다니느니 차라리 행복에 눈길을 주지마라. 불행은 행복의 그림자이다. 그깟 사탕같은 행복 많이 먹어봐야 인생에 충치가 생기고 결국은 인생을 발치당한다. 어린아이일수록 사탕을 입에 달고 있드시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행복을 갈구한다. 성숙한 사람의 먹거리 목록에 행복이란 없다. (행복을 말한 성인이 있다면, 그는 이미 성인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행복의 보따리와 불행의 보따리로 나누어서 담으려 한다. 그러면서 되도록이면 행복의 보따리는 크고 불행의 보따리는 작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동일한 크기의 불행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불행해 보이는 사람도 동일한 크기의 행복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두 보따리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서 번갈아 들고 있다. 파도가 마루와 골로 이루어져 있드시 인생 또한 행복과 불행으로 균형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이 크지면 뒤따라서 불행도 크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두 보따리를 풀어서 합쳐버리는 일이다. * * * 나는 40년 전에 행복해지기를 포기해버렸다.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지금 생각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