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가는 길 895

사랑의 예수

신의 독생자 예수는 아버지를 배신함으로써노여움을 사서 골고다고원의 십자가에 매달렸다.신은 만물을 서로 사랑하도록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창조하였다.그것은 생명 개체의 생존을 위한 신의 한수였다. 동물은 서로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지도 않는다.인간만이 사랑을 가지고 서로 미워하고 싸운다.예수는 아버지를  오해한 것이다, 신은 사랑이 아니라 텅빔이다.예수는 재림할 수없다, 천국에 없기 때문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Carpe Diem

과거에 했던 일이나 일어났던 일이 문제가 되는가. 그러면 과거는 잊어버리면 된다. 하지만,기억은 잊어버리겠다고 마음 먹는다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다만,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 문제일 뿐이다. 미래에 할 일이나 일어날 일이 문제가 되는가. 그러면미래는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생각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다만,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 문제일 뿐이다. 결국, 과거와 미래는 실존이 아니다, 생각이다.실존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뿐이며,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그러면 과거와 미래는 생각에서 사라진다.

사랑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사랑의 화신 예수조차도 모른다.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고원으로 올라가야 했다.다만, 자신이 걸치고 있는 거북등껍질같은 갑옷은 벗어던질 수 있다.갑옷을 벗고 있으면 벌레들이 달겨들 것이다. 만일, 벌들이 달겨든다면 그대는 꿀이다.만일, 파리가 달겨든다면 그대는 똥이다.아무 벌레도 달겨들지 않는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다.그대는 Nothingness, 즉  텅빔이며, 그 텅빔이 바로 신의 사랑이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선악과와 텅빔

모든 관념, 개념, 사상, 이념, 등을 비워라.그리하여 텅빔이 되어라.그 텅빔에는 윤리도덕조차도 들어있지 않다. 윤리도덕이란,인류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보호하기 위한 표식일 따름이다.그런 표식조차도 머리에 붙이고 다니지 마라 텅빔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옳다, 아니다.텅빔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다시 말하면 죄가 없다.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텅빔이었다.선악과를 따먹자 텅빔이 파괴되어 자신의 앞을 가렸다.텅빔이 되는 것, 그것이 낙원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사랑과 텅빔

이종의 두 동물간에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불가능하다.인간의 눈에는 사랑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텅빔이다.서로 사랑하려고 든다면, 미움이 싹튼다.상대방에게서 사랑할 수 없는 점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사랑과 미움은 동반관계다. 그래서친구간에, 연인간에 ,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쉽게 미움이 싹튼다. 예수는 붓다의 자비를 알았지만 히브리어에는 자비라는 말이 없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예수의 12제자들은 아무도 예수의 자비를 알아채지 못했다.그 결과 기독교는 인류에게 사랑을 심어줄 수 없었고, 도리어 미움만 가중시켰다.예수의 기독교와 모하메드의 이슬람교가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붓다의 자비(慈悲)도 텅빔이요,노자의 도(道)도 텅..

지식

모든 지식을 버려라.그것이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가리지 말고 버려라.그가 붓다라 할지라도, 노자라 할지라도, 예수라 할지라도 가릴 것이 없다.모든 지식을 버린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지식은 편견일 뿐인 것은 이원성의 언어자체가 편견이기 때문이다. 붓다도 임종을 앞두고 자신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노자도 아무말 없이 히말라야로 숨어들었다.예수도 자신이 한 말이 짐이 되어서 골고다고원의 십자가에 올라갔다. 모든 지식을 버리고나면 텅빔만 남는다.그 텅빔을 일러 붓다는 니르바나라 했다.그 텅빔을 일러 노자는 道라 했다.그 텅빔을 일러 예수는 하나님이라 했다.색즉시공 공즉시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