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and

Epilogue

박희욱 2018. 10. 26. 17:50

나의 해외여행은 1990년도에 5주간의 유럽배낭여행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첫 도착지가 영국의 런던이었다.

그때는 언제 다시 유럽을 여행할 수 있겠는가 싶어서 끼니도 걸러가면서 미친듯이 돌아다녔다.

얼마나 힘든 여행을 했던지 나의 갸날픈 몸매에 7kg이나 줄어든 몸으로 귀국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편없는 몰골로 정신없이 길거리를 해메고 다니는 한 아시안을 보는 현지인들 눈에는 참으로 가련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첫단추가 되었다.


그때 여행을 떠나면서 두가지를 알고 싶었다.

그 하나는 피카소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앞선 원인을 알고 싶었다.

피카소의 작품은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과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을 들렀지만 이해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두번째 의문은 런던에 도착해서 여행을 시작한 첫째날에 어이없게 풀려버렸다.


제일 먼저 트라팔가 광장을 구경하고나서  웨스트민스트 사원을 보았는데, 무엇보다도 섬세한 조각술에 놀라고 말았다.

우리의 돌하루방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는 조각을 보다가 우리의 목조각보다 훨씬 더 섬세한 석재 조각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 본 것이 국회의사당이었는데 내 입에서 감탄사와 함께 욕짓거리가 튀어나왔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종교건축이니까 그렇다 치고 국회의사당은 기능적 건축인데 

저토록 엄청난 제정을 투여하는 것이 과연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것은 자유경쟁의 소산이라는 것을.


동양사회는 중앙집권적 국가여서 중앙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자유경쟁이 불가능하였다. 

비근한 예로 조선왕조는 99간 이상의 건축은 금지하였다.

반면에 유럽은 수많은 민족이 수많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런 다양성 속에서 자유경쟁이 활발했던 것이다.

이럴테면 독일은 300여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봉건국가였고, 영국과 프랑스도 봉건제도를 겪었으며,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다가 겨우 19세기 말에 들어와서 통일되었다.

일본 또한 그런 봉건제도를 거쳤는데 산업화가 일찍 이루어진 모든 나라는 봉건제도를 그친 나라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매스컴과 사실상의 단절을 한 지난 20여년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자유주의자이고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보수주의자로 분류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통제경제를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70여년의 긴 시험 끝에 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힘이 없이는 발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포도알이 튼실하지 않고서는 포도송이가 튼실할 수가 없다, 사실상 포도알은 있어도 별도의 포도송이란 없다.


사랑이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희망 사항이지 실재로는 경쟁과 투쟁이 신의 섭리다.

사랑조차도 경쟁으로 시작된다. 그 신의 섭리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이제 조선이 그렇게도 피폐한 나라가 된 원인을 알 것 같다.

40% 이상의 백성이 노비인 나라가 어떻게 부를 축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본인들은 노비들의 수동적인 근성을 보고 조선인들을 노예근성을 가진 민족이라고 한 것이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백성들은 겨우 먹고 입을 정도의 일만했다고 한다.

주인 아닌 노비가 무엇 때문에 성심을 다할 것인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조센징들은 날일 시키면 부지하 세월이고, 돈내기 시키면 죽을까 겁날 정도로 일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노예근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일본인들의 근로정신은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 일본에는 이치닌마에(一人前) 정신이 있다.

보수와 관계없이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내 스스로 다해야 한다는 정신이다.

和의 사회에서 이치닌마에를 지키지 않으면 소위 말하는 이지매를 당한다. 그 이지매는 한국의 왕따와는 전혀 다르다.


외국인 기록을 보면 조선말기에는 누가 재산이 늘었다고 소문이 나면 즉시 관가에 끌려가서 매타작을 받았다고 한다.

밤마다 관가를 지나갈 때면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외국인 기록이 있다.

그렇게 하면 쌀 한되박이라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이 생기면 축적을 하지 않고 먹어서 조졌다고 한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땟갈이라도 좋다', 이런 속담은 전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는 없을 것이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왜 우리나라에는 그럴듯한 유적과 유물이 없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는데 이제사 그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

아무리 땅이  메마르다 해도 이렇게 인구밀도가 높을 수는 없다. 아무리 관리들이 수탈을 많이 했다 해도 그 잉여생산물이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 잉여생산물이 빈약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노비근성으로 말미암아 근로의욕이 없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소위말하는 양반들은 안빈낙도를 제일 덕목으로 삼았으니!


이승만에 의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되어서 자본주의를 처음으로 맛보자 박정희의 지도하에 헝거리 복서처럼 뛴 한국인들은 드디어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헝거리 정신으로 일했던 한국인들은 이제 지쳐버린 것일까.

이제는 어깨동무하고 살자는 인민들의 정신을 가진 국민들이 늘어나서 인민의 나라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자본주의는 선착순이 덕목이다. 그렇지만 선착순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러나 선착순의 훈련 없이는 이웃의 등쌀에 살아남아서 국가를 온전히 보전하기는 어렵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하여 북쪽 함흥에서 2년을 근무했다는 어느 친구의 목격담에 의하면,

무논에서 모심기를 하는데, 여자들은 허리를 굽히고 힘들여 일하는데 남자들은 논두렁에 앉아서 가위손으로 담배를 꼬나물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표정들이 매우 편안해 보이더라는 것이다.


북쪽 인민들은 옛조선시대의 노비근성을 아직까지 물려받고 있는 것 같다. 일제시대에도 왜인들의 압제하에서 노비근성을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어버이 수령 것인데 내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매관매직을 해도 백성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라가 조정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난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 300만명이 아사해도 반동분자 외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자유민주주의를 견딜 능력이 없는 북쪽의 인민들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면 남쪽의 인민들과 합세하여 통일된 한반도는 사회주의 국가가 될 가능성이 매우 짙다.

지금의 이 정권도 그 사실을 꽤뚫어 볼만큼은 영리하다.

남미를 비롯하여 사회주의로 전환된 모든 국가의 말로를 보라,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                                                                          *                                                                     *



5월 15일에 출국하여 9월 6일에 귀국을 했으니 115일간의 여행을 마쳤다.

출국을 할 때는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울 견뎠다는 곰의 마음으로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115일을 견딜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조기귀국을 각오하고 출발하였다.

115일간의 긴 여정을 덥석 질러버린 것은 나의 인내력을 시험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사실 내가 예상했던 대로의 기상상태였다면 조기귀국을 했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스코틀랜드의 스카이섬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그 이후 잉글랜드의 남부까지 내려오기 전에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날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 주룩주룩 오는 비는 서너번을 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의 한계였던 3개월을 넘겼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확장해야 하고 그것이 삶의 의미이다.

그 한계는 백터량이 아니라 스칼라량이다.

나는 다른 삶의 의미는모른다.

아무리 크고 멋진 챗바귀라 할지라도 다람쥐 챗바귀 돌리는 식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아마도 이 여행을 계획하는데 4개월 쯤 걸렸을 것이고, 여행을 하는데도 근 4개월이 소요되었다.

또 5,000여장의 사진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리는데 1개월 반이 걸렸으니 도합하면 근 10개월이 소요된 것이다.


이제 내 생명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 남은 삶은 그렇게 오래지 않다.

남은 내 삶을 완전히 불태워서 한줌의 재도 남기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불로써 굳이 백자를 구어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가 될지, 도기가 될지, 아니면 토기가 될지는 신의 소관이기 때문이고,

신에게는 백자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토기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뒤에 재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일단 모든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지만 블로그 작업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사진을 좀더 정리할 것이 있고, 더 중요한 작업은 여행중에 있었던 나의 단상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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