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日本)

2017년 일본여행 - 들어가면서

박희욱 2017. 5. 4. 06:57

일본열도

 

출발지와 최종여행지

 

 

 

여행경유지

 

후쿠오카에서 교토까지는 자전거를 이용하였고,

교토에서 나고야, 나고야에서 후지시까지는 신칸센을 이용하였다.

후지시에서 후지요시다까지는 자잔거를 탔으며, 후지시로 되돌아올 때는 버스를 이용하였다.

자전거 총주행거리는 1,450km였다.

 

 

이번 여행은 3월 22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후쿠오카에서부터 시작하였고,

4월 27일에 후지시를 출발하여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에서 환승한 다음에 후쿠오카까지 와서 다시 고속페리로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최종목적지에서 당일에 부산항까지 돌아온 것이다.

여행중에 예기치 못한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 가져간 비상약도 손도 대지 않았다.

분실물도 야영장에 두고온 목욕타올이 전부이고, 자전거 트러블도 없었다.

 

본래 계획은 나고야까지 여행하는 것이었고, 후지산은 막연한 희망에 지나지 않았는데 거기까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계획했던 모든 도시를 여행했으나 애초에 계획했던 루트를 따르지는 못했다.

그 계획루트는 일본사이클링(http://www.japancycling.org/)을 참고로 해서 짰던 것이었다.

 

 

 

 

 

이번 여행은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떠났던 것인데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매우 좋은 인식을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일본문화의 뿌리가 생각보다 훨씬 깊어서 결코 중화권문화의 한 지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은 것으로 믿고 있으나 그것은 일본에 대한 컴플렉스에서 비롯되는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기껏해야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의 애기일 뿐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7세기 초에 수나라에 문화사절(견수사)을 보냈고, 그 이후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 시절에는 견당사를 보냈으며,

10세기에 들어서는 더 이상 중국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해서 견당사 파견을 중단해버렸다.

그것이 일본의 교만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다는 의미이고, 일본인들은 결코 한국인들처럼 교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한 수 위의 문화라면 언제든지 허리를 굽히고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국민성이다.

지금도 일본에는 어디든지 책방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독서열도 서양인들처럼 대단하고, 출판왕국이라 불리고 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다싶이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예의를 잘 지키고(여행중에 만났던 독일인 말은 일본인들은 polite하다고 했다),

결코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준법정신이 철저하고, 부지런하고, 근검성실하고, 거기다가 완벽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 국민적 기질은 뿌리깊은 문화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메이지 유신에 의한 서양문물을 조금 일찍 받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일본인들의 기질은 이번 여행에서 모두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근세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한반도를 어떤 측면으로 봐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공자가 그런 말을 했다는데, 그가 한반도 사람을 알았다면 얼마나 알았을까? 헛소문을 들었슴에 틀림없다.

비록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2500년 전의 그야말로 이야기일 뿐이다.

아니면 일본을 두고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날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의 폭력 얘기를 들어면 믿기지 않는다.

군대의 폭력문화, 나는 이것이 일본군대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선시대 갑오경장 이전에는 범죄자라고 입건만 되면 일단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나서 보는 법문화였다.

지금 북한의 정은이가 하는 짓거리-공개처형을 해서 본때를 보여주는 것,

그것은 범죄자를 육시해서 전국으로 돌리는 조선시대의 뿌리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이제사 알게 되었다.

세상의 어떤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욕찌거리 문화, 그것도 버젓이 TV에서 방송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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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반도가 중국보다 훨씬 가깝다는 이유로 한반도로부터 일본문화가 전수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 돌아와서 동아시아의 지도를 다시 보았더니 그렇지가 않았다.

나가사키에서 상해로 가는 직행거리와 완도를 경유한 고려의 수도 송도로 가는 거리를 비교해 본다.

 

 

백제의 잔여 세력과 왜군, 그리고 나당 연합군이 싸웠던 국제전 - 백강전투에서 패한 백제인들 중에서 20만명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인구가 50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7세기의 20만명이라면 엄청난 인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해적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그 왜구의 뿌리는 망명한 백제인들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국 왜는 한반도의 통일신라로부터 문화를 수입하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생각해보자.

위의 지도를 보면 일본인들은 어디로부터 문화를 수입하는 것이 수월했을까?

길도 제대로 없는 부산에서 고려의 수도 송도까지 많은 짐을 가지고 이동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므로 해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 경우 송도나 한성까지 가려면 완도를 둘러서 가야하는데 그 길은 결코 중국 상해로 가는 해로보다 가깝지가 않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 사절단은 중국인들과 한국인들 중에서 어느쪽의 대화소통이 원할했을까?
당연히 중국인들과의 소통이 훨씬 더 원할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의 식자라면 한자와 함께 중국어를 공부했을 테니까.

한국인들과 소통을 할 때는 필담으로 했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중국인들과는 구술로 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한반도의 문화도시라면 송도나, 한성밖에 없었겠지만 중국의 상해로 들어가면 강과 운화를 통해서 수많은 문화도시를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를 수입하자면 서울에 가서 수입하지 뭣 때문에 시골에 가서 문화를 수입하겠는가.

 

간단히 말하면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오래전에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직수입하였고, 훨씬 오래전에 한반도 문화를 추월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일까. 웬만한 역사학자라 할지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이미 11세기부터 추월했다고 본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 일본에는 이미 10세기에 히라카나라는 표음문자를 완성하였다는데 있다.

 

문자는 문화창달에 대단히 중요하다. 지중해의 변방이었던 그리스가 세계최초의 표음문자를 완성하여

담박에 이집트문명, 크레타문명, 에게문명, 등을 추월해버린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 기적과도 같은 찬란한 그리스문명은 표음문자에 기인한다고 본다.

내가 본 척박한 그리스땅에는 문명을 꽃필만한 문자 외의 다른 아무런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한국의 급작스런 발전도 한글전용정책에 힘입은 바가 큰데도 불구하고 그 정책을 결단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일본은 11세기에 세계최초의 장편소설을 만들어 냈는데, 한글 소설 홍길동전은 17세기에 들어서다.

일본역사에 관심이 많은 어떤 지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일본문화는 10세기부터 한반도 문화를 추월하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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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일본의 닛꼬와 카마쿠라를 여행하면서 느낀 일이지만 일본은 큰 나라이고 대단한(스고이) 나라인데 , 이번 여행을 통해서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에는 서양인들을 비롯한 관광객이 엄청 많았는데, 아마도 일본의 관광수입은 큰 흑자를 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지금의 반일감정, 또는 배일사상을 버리지 않으면 큰 손해이고, 어쩌면 그것으로 인하여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실제로 개화기에 수구파들이 청에 의지하려 했던 것은 중화사상이 큰 이유겠지만 배일사상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청나라 군대를 한반도로 끌여들였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한반도가 친러화하자 일본은 러시아의 위협을 받았다.

러이아인들이 남해안에 석탄창고를 지으려고 시도한 것은 대한해협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은 일본의 멱살을 잡는 행위였다.

당시에 5대 강대국이었던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자구를 위한 결단이었고, 한반도 접수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기질에 큰 차이가 나는 것 중에 하나가, 일본인들은 자기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면 즉시 허리를 굽힐 줄 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좀 다르다. 한국인들은 마치 강자에게 대드는 것이 정의인 것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과 한국인들 중에서 약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할까? 우리는 일본인들은 약자를 괴롭힌다고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내가 어찌 그것은 알겠는가마는 친한파 미국인 H. G. 헐버트의 1906년도 저서에 보면 한국인들은 조금 지위가 상대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고, 완장을 채워주면 기고만장하는 기질이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런 일화를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미국 달러($)를 좀 맡겼더니, 아주 준 것도 아닌데, 어께를 으쓱대고 다니더라."

한국인들은 실익을 챙길 줄 모른다.

 

일본은 일찌기 당대의 강국 몽고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당시 강대국 명나라와 맞짱을 떴다.

종이 호랑이라도 호랑이었던 청나라와 맞받아쳤다.

아무도 이기리라고 예상 못한 러시아아와 일전을 겨루어서 승리했다.

감히 미국이라는 신흥대국과 일전을 겨루었다.

이래도 일본의 강자에게 약하다는 것인가?

오랜 역사기간 동안 비록 잘한 일이라 할지라도, 아무튼 우리는 강자 중국에 굴종했던 민족이다.

개화기시대의 외국인들은 한국의 청나라에 대한 굴종의 자세를 안타까워했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다. 그래서, 어쨌던 간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으니까 반일감정도 좋고, 배일사상도 좋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가지고 다니는 것은 고도리판에서 '못먹어도 고!'하는 것과 같다.

과연 일본에도 못먹어도 고하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1억3천만명의 거대한 시장이다.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가 거의 80%에 육박하는 반면 일본은 겨우 30%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 80%중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의 30% 중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은 세계가 알아주는 강대국이다.

국제사회는 대한민국의 말에 귀를 귀울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말에 귀를 귀울인다.

자! 100여년 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가 분사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그때 아무도 한국사절단을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의 적국이었던 러시아대표조차도 만나주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을 여행한 외국인이 두 나라를 비교할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과히 좋지가 않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어느 일본인에게 한국의 반일감정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본인이 반일감정에 대해서 물어본 것도 아니고, 상대방에게 불편한 질문을 할 일본인의 국민성도 아니다.

한국의 반일감정은 한국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이고, 사실은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을 좋아하고,

나는 일본인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은 반일감정을 이용하고 있다.

어떻게? 반일감정은 한국인의 공통된 정서이기 때문에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면 감정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짓이 국가의 미래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자들이 정치인들이다.

 

나는 이제 소위 말하는 완전한 친일파가 되어서 돌아왔다.

일본을 향해서 돌을 던져 봐야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다만 튕겨져 나오는 돌에 제 눈두덩이를 맞을 가능성은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합바지이고, 일본인들은 당꼬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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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이 많이 있지만 자아피판적인 진술은 그만해야겠다.

몇몇 친구들에게 말해 봤드니 반발심만 유발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것도 한국인들의 기질이다.

 

 

 

 

여행중 기상상태

여행지역의 기온이 부산보다는 높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태평양 해류의 영향으로 겨울 기온이 그렇게 낮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는데, 아마도 한류인 쿠릴해류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을 수도 있겠다.

여행중에 최저기온은 영상 4도였다. 야영중에 추운 날이 많았고, 수낭에 물은 끓여넣어서 유담프를 만들어서 이용하였다.

벚꽃의 개화시기도 부산보다는 제법 많이 늦었다.

특히 후지산 산자락의 후지요시다의 기온은 많이 낮아서 귀국할 즈음에도 벚꽃이 생생하였다.

고도(800m)가 높아서인지, 아니면 후지산의 눈바람의 영향인 듯하다.

 

또, 섬나라라 비가 잦을 것이라 생각하고 각오를 하였는데 이것도 예상과는 달라서 히로시마에서 하루를 꼼짝없이 호스텔에 머문 것,

그리고 야마구찌로 갈 때 오전중에 자전거주행을 멈추고 불시에 텐트를 치고 야영한 것,

그리고 나라에서 교토로 갈 때 비를 만나서 오후 2시경에 주행을 멈추고 호텔에 투숙한 것이 우천의 영향을 받은 것 전부였다.

 

 

도로주행

역시 인구가 많은 나라라 교통량은 많았다. 국도는 포장이 잘된 별도의 인도가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국도와 나란히 별도의 도로가 있는 경우도 많아서 자전거주행의 어려움은 없었다.

특히 오르막에서 자전거주행속도가 늦을 것을 감안하여 반드시 별도의 인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노견은 좁으나마 포장상태는 우리보다 좋아서 주행에 문제는 없었다.

운전자들의 매너는 매우 훌륭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와는 달리 국도에서 속도감시카메라는 본 적이 없었다. 누구나 속도를 준수한다는 얘기다.

지방도(현도)에는 노견조차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주행에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두어번은 대형트럭이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바람 때문에 휘청거린 적이 있었다.

 

시내에서는 반드시 교통신호를 지켜야 한다. 현지인들이 교통신호를 준수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에는 대부분이 경차라서 좁은 골목에서 언제 자동차가 튀어나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워낙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 그들은 신호등만 보고 운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이번에 여행한 지역의 도로경관은 볼 것이 없었다.

더구나 도시가 워낙 넓어서 도시와 도시 사이가 주택과 같은 건물에 이어지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내가 여행한 지역은 자전거여행으로는 부적격이었고, 일본에서의 자전거여행은 추천하고 싶지가 않다.

 

 

 

 

 

야영 및 숙박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처럼 유료야영장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일부 오토캠핑장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여행한 지역은 발견할 수 없었다.

딱 한 번 후지시에서 후지요시다 가는 길에 1,600엔 짜리 유료캠핑장을 만날 수 있었다.

야영할 만한 장소를 적시에 적당한 장소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

도시내에서 야영할만한 장소는 하천부지내의 운동공원 같은 곳인데,

이런 곳도 화장실과 급수시설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야영장소로는 부적당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저녁이면 모를까 대낮에, 도난의 염려는 없다고 해도, 텐트를 쳐놓고 시내구경을 나갈 정도의 배짱은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호스텔이나 저렴한 호텔을 많이 이용하였다.

 

호스텔은 최하 2,200엔에서 최고 4,200엔 짜리까지 있었는데, 닭장같은 경우가 많아서 불편했고,

서비스 시설도 협소해서 마음편이 취사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워낙 조심스런 일본들이고, 또 대부분이 서양인들이라 잠자는데는 전혀 방해를 받지 않았다.

 

호텔은 대체로 5,600엔 정도면 싱글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면적은 콧구멍만한 것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협소했다.

 

식사

야영할 때는 아침 저녁은 반드시 취사를 했고, 점심은 도시락을 이용하였는데, 곳곳에 편의점이 있어서 무척 편리했다.

도시락은 600엔 정도면 훌륭한 한끼 식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