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퇴계 이황

박희욱 2025. 3. 3. 07:48
퇴계가 가진 대학자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청렴결백한 것을 넘어서
 
빈한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로는 당대의 양반들이 으레 그러했듯 퇴계 역시 재산 치부에 꺼리낌이

없었으며 조금 부유한 정도가 아니라 한 지역의 대부호에 가까웠다.

이황이 죽고 나서 자식에게 상속한 재산의 분재기(分財記)에 따르면
 
이황 집안의 토지는 전답(논밭)이 합계 3000두락으로 약 36만 4천 평에
 
달하였고 노비가 남녀 합쳐 376명에 달하였다.
 

당대 사림 지주들의 평균적인 재산이 논밭 300두락에 노비 100여 명이었음을

비교해 보면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부유했던 편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황은 직접 집안일에 나서서 재산 치부에도 여념이 없었는데,
 
가령 집안의 노비들을 양인과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하고
 
노비의 숫자를 불리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자식들에게도 가르칠 정도였다.
 
제도에 안주하여 개인적 안정을 구축해놓고 관념철학에 심취한 인물이다.
 
양명학에 대한 태도는 그의 편협함을 보여준다.
 
그가 본의 아니게 조선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지대하다.
 
나아가서 한민족의 피를 더럽힌 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그를 두고 성인이라 말하는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성인이라면 노비 해방운동을 했겠지만, 반대로 그는 일천즉천법을 이용하여
 
노비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고 매우 큰 부자였다.
 
이런 경제적 토대라는 화사한 정자를 지어놓고 그 위에서
 
리학이라는 자기만족적 관념에 빠져 살았던것이다.
 
그는 성리학 외의 학문은 사문난적이라 하여 실용적인 학문의 발달에 독이 되었다.
 

 

청빈을 자랑으로 여긴다던 성리학자 사림파들 중에서도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조차 실제로는 수백 명의 노비를 부리던 대부호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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