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 America

프롤로그(Prologue)

박희욱 2015. 4. 18. 09:20

들어가면서

 

나의 여행은 힘들지 않은 여행이 없었지만, 또 하나의 어렵고 힘든 여행을 해냈다.

이 여행은 2015년 1월 20일 인천공황을 출발하여 남미 5개국과 갈라파고스섬을 여행하고 4월 16일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한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 연일 사진을 정리하고 블로그 작업을 하는데 거의 4주간이나 소요되었다.

나의 여행은 여행준비와 여행 그리고, 블로그 작업 등, 3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여행을 한 것은 약 3개월이지만 실재로는 7개월 쯤 걸린 셈이다.

 

내가 첫 유럽배낭여행을 할 때는 촌음을 아끼려고 헐레벌떡이면서 쫓기다시피 여행을 하였다. 

첫 자전거 여행이었던 미국/캐나다 여행 때도 여행일정에 쫓기면서 페달을 급히 밝아대서 동행하던 일본청년이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버렸다.

그러던 것이 여행을 거듭할수록 점점 여유로워져 왔고, 이번 여행도 일정을 여유있게 잡으려고 했다.

그런 덕분에 여행일정에 없었던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섬 여행도 할 수 있었다.

 

남아메리카에는 14개국이 있고, 인구는 약 4억명인데, 내가 여행한 나라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5개국과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섬이다.

땅덩어리가 남한의 약 180배나 되는 넓이이니까 85일간 남미 땅을 밟아보고 남미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을 고작 반일 동안 돌아보고 대한민국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보았던 남미 땅은 매우 활량하고 매마른 척박한 땅이었다.

 

 

남미에는 아마존이라는 거대한 강이 있지만 정글을 흐르는 강이고, 온대의 기름진 땅을 흐르는  문명이 싹틀만한 큰 강은 없다.

그래서 스페인 무법자들에게 정복당하기 전에 8천만명의 인구가 있었지만 발전한 문명이 싹틀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잉카문명이 해발 3,800미터의 티티카카호 주변에서 발생했던 것이 의아스러웠는데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겨우 티티카카호 주변에만 비옥한 농경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금은 기계력에 의존한 관개농업이 발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남미에는 철기문명이 없었다.

아마도 4천 미터에 가까운 고지대에서는 산소농도가 낮아서 1천도 이상의 고온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철광석을 재련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카인들은 순도 70%이상의 철광석을 이용하여 돌을 갂았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고지대에서는 튼튼하고 큰 목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 목재건축 대신에 석재건축이 발달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 남미의 가축은 라마과 동물 밖에 없었고, 말, 소, 양 등은 유럽에서 들여온 것이다.

그러니 가축의 힘도 빌리지 못하여 잉여농산물도 빈약했을 것이니 문자를 발명할 정도의 문명이 발전할 토대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페루를 중심으로 볼리비아, 에콰도르, 칠레 북부에 걸쳐서 발생했던 잉카문명은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쓸줄 모르는 돼지치기 피사로와 성경을 손에 든 신부 발데베르에 의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총칼과 대포로 무장한  270명의 피사로 부대는 비무장 7천명의 군대를 대동한 잉카 황제와 맞닥뜨릴 때 바지에 오줌을 적실 정도로 겁을 먹었다.

이때 신부 발데베르는 남미땅에 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주저하지 말고 잉카군대를 공격할 것은 피사로에게 종용하였다 한다.

 

내가 본 남미땅의 대성당들은 지나치게 화려한 바로크양식의 건축이었다.

총칼로써 잉카제국을 파괴하고, 대성당의 위용으로써 잉카인들의 기를 꺽음으로써 잉카문명을 파괴한 것이다.

피사로는 총칼과 대포, 갑옷으로 무장하고 유럽문명의 우월성으로 우쭐대면서 잉카제국을 파괴해 들어갔을 것이다.

발데베르 신부 또한 잉카인들의 태양신 숭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유일신 여호와를 숭배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래서 잉카인들은 어찌하여 우리가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고 당신들이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 물음에 대해서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변명이 궁색할 수 밖에 없었다.

 

스페인인들은 로마교황청에 인디오들이 과연 인간인지 아니면 동물인지를 질의했다고 한다.

그 저의는 인디오를 동물처럼 부려먹는데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행히 교황청에서는 논의 끝에 인간으로 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인류문명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끝없이 나아가겠지만 항구를 떠난 타이타닉호처럼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영원히 대양을 헤맬 것이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은 무성히 자라기는 하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는 관엽식물과 같다.

분명히 물질문명은 인류에게 편리와 안락을 제공하여 준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곧 불편으로 변하고 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류문명 또한 온우주의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넘어갈 수 없다.

 

자동차, 비행기가 아무리 빨라도 내 다리로 달리는 자전거보다 못하고,

텔레비젼은 지구촌 구석구석을 보여주지만 직접 가서 보는 여행보다 못하고,

핸드폰은 지구 반대편 사람에게 메세지를 전할 수 있지만 엽서 한장보다 못하고,

컴퓨터가 많은 일들을 순식간에 해치우지만 손가락을 세던 시대보다 일이 줄어들기는 커녕 더 늘어났다.

 

 

잉카제국이 맥없이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정복당한 것은 피사로에 앞서 먼저 도착한 유럽인들에 의하여 전파된 전염병 때문이었다.

그 전염병에 의하여 수많은 국민들과 함께 잉카황제가 죽고,

그 제위를 차지하기 위한 내전이 발생하여 국력이 피폐한 시점에 운좋은 피사로가 도착한 것이었다.

잉카황제가 처형된 이후 약 40여년간 잉카인들이 침략자들에게 저항을 하고,

한때는 피사로의 쿠스코를 포위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패퇴하여 굴복하고 말았다.

잉카제국이 정복당하고나서 100년도 되기 전에 8천만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던 인구가  불과 500만명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어찌 이런 재앙이!

신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7천5백만명을 솎아낸 것인가!

 

피사로는 고지대 쿠스코를 피해서 지금의 페루 수도 리마를 건설해서 옮겨왔다. 아마도 잉카인들의 저항이 거세었던 모양이다.

그는 잉카황제를 처형한 2년 후 자신의 정복 동업자였던 알마그로의 아들에 의하여 피살되고 말았다.

피사로가 알마그로를 처형함으로써 그 아들에게 복수를 당항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에 칼을 찔려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 바닥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죽었다고 한다.

신에게 천국으로 불러줄 것을 빌었을까.

 

발데베르 신부는 피사로를 죽인 일당들에게 목숨의 위험을 느껴서 도망치다가 자신이 페루로 올 때 들렀던 에콰도르의 푸나섬에서

식인종 원주민들에 붙들려서 저녁 만찬 식탁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죽임을 당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사람들을 좀 더 신의 왕국으로 가깝게 이끌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며, 신을 팔아서 밥을 먹은 자에 불과하다.

어쩌면, 불고기 꼬치가 되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올라선 예수로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내게는 발데베르 신부의 모습이 남미 저항의 깃발 체 게바라의 모습이 겹쳐져서 떠오른다.

발데베르는 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고, 게바라는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발데베르는 인디오들에게 질곡의 역사를 견뎌야 하는 굴레를 씌웠고,

게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은 사살하였고,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최악의 인권국가 쿠바를 건설하는데 일조하였다.

 

게바라는 나를 지지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총을 들겠다고 한 사디스트적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게바라를 저항의 깃발로써 이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가 한 일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한 일이었던가!

그가 난사한 총알을 맞고 죽은 사람들도 모두 어느 부모의 자식이거나 처자식을 거느린 지아비였다.

 

그는 차라리 한 명의 가장으로서, 한명의 의사로서 일생을 보냈더라면 조금이나마 인류의 행복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쿠바를 떠난 게바라는 아프리카에서 총을 들고 떠돌았는데, 남의 나라에 와서 혁명을 하겠다고 나선 그는 현지인들의 미움을 사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돌아나왔다.

그런 게바라는 카스트로가 건재한 쿠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거기로 돌아가면 결국은

숙청을 당하거나 아니면, 카스트로의 비굴한 제2인자 노릇을 해야 하는데 게바라의 성미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볼리비아 산악에서 혁명을 한답시고 총질이나 하다가 죽임을 당하여 잘린 손목만이 쿠바로 돌아갔는데,

카스트로로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겠는가, 게바라 스스로 제발로 사라져 주었으니까!

물론, 애써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몇 방울의 눈물을 보여주었겠지만.

게바라의 죽음 덕분에 게바라의 처자식은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체 게바라! 그는 쿠바 상무장관의 자격으로 공산주의 독제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 북한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등이다.

자본주의의 심장을 겨눈다고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을 가져온 것도 게바라의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대한민국의 박정희를 만났더라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게바라는 철없는 무서운 악동에 불과한데 잘생긴 얼굴 하나 때문에 죽어서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기가막힌다.

총을 들고 산에 숨어서 혁명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도 인류역사에서 혁명이 애초의 뜻대로 성공한 예가 있는지 모른다.

모든 혁명은 종래에는 실패한 것으로 안다.

 

무슨 일이든지 이유를 파고 올라가면 정당성 하나쯤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옛부터 처녀가 아이를 배어도 할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발데베르나, 요즘의 알카에다나, 시리아의 IS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를 보고 말해야지 원인을 가지고 말해서는 안된다.

말은 주로 원인과 관계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그냥 쳐다보면될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고 하는 것이다.

 

신은 있는 그대로이다, 있는 그대로!

그러니 말하려들지 말라!

그러니 설교하려들지 말라!

 

역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자들의 오랜 무자비한 통치로 인하여 오늘의 인디오들은 매우 수동적인 인간형으로 고착되고,

신분차별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안타깝다.

남미에서의 빈부격차는 풀수 없는 문제이다.

리마 민박집 주인은 페루인 5명이 할 일을 한국사람이면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다고 했는데,

좀 과장된 말이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수동적인 인간형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아진다.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고, 책임을 회피하기 일쑤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은 피정복민 식민지적 근성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인류의 독특한 한 문명이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무척 아쉬운 일이다.

 

 

나는 애초부터 남미의 도시관광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추측한데로 바깥으로 드러난 도시의 모습은 볼 것이 없었다.

거대한 성당건축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유럽의 아류이고, 그것도 낡은 아류라서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모두들 좋아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조차도 내게는 볼 것이 없어서 4박이나 보내게 된 것이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여행에 대한 느낌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조심스런 말이지만 남미에서의 도시관광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같다.

 

남미가 아무리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라 해도 엄청나게 넓은 땅이라 가보아야 할 대단한 곳이 여러곳 있었다.

리우데자네이루항, 이과수폭포,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엘 찰텐의 피츠로이산, 페리토 모레노 빙하국립공원,

우유니 사막투어와 소금호수, 마추픽추,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유니 사막과 이과수폭포, 피츠로이를 최고로 꼽을 수 있겠다.

 

그 외에 좋았던 곳은 아타카마 사막, 루레나바케의 팜파스투어, 티티카카호의 태양의 섬, 쿠스코, 피삭, 바예스타스섬, 와라스의 69호수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쿠스코를 제외하면 모두 자연이며, 무형의 것으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탱고가 대단한 감동을 주었다.

하룻저녁의 탱고 공연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4박을 하게 된 후회스러움을 해소해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관광이 별로였던 곳도 있었다.

상파울루, 부에노스 아이레스, 산마르틴, 엘 칼라파테, 푸콘, 산티아고, 멘도사, 살타, 후후이, 라파스, 등이다.

이들 중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탱고공연을 보려면 들려야 할 곳이고,

엘 칼라파테는 파타고니아 여행을 중심지이므로 안들릴 수가 없는 곳이며,

라파스는 팜파스투어나 정글투어, 그리고 죽음의 길 라이딩을 위해서는 들려야만 할 곳이다.

푸콘은 예정했던 화산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면 또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살타는 '1만 시간의 남미여행'의 저자 이민우 씨가 극찬한 곳이라서 기대가 컸던 것만큼 실망도 컸던 곳이었다.

나중에 살타가 매우 좋았다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승용차를 렌트하여 둘러본 근교가 좋았다고 했다.

그 근교라는 것이  후후이, 틸카라, 우마우아카, 등이라면 그렇게 찬탄할 정도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멘도사는 와이너리투어를 기대했는데 실망이었다.

 

다음에 중미를 여행할 기회가 있울 때 가보려고 했던 갈라파고스 여행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여정에 없었던 만큼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여행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만났던 어떤 아가씨는 갈라파고스에서 3주간이나 지냈다고 한다.

겨우 9일간 6개의 1일투어를 했던 나로서는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가장 좋았던 곳은 세들의 낙원 세이모어섬과 이사벨라섬이었다.

이사벨라섬은 1박 2일 투어와 2박 3일 투어가 있는데 당일치기를 한 나는 좀 아쉬웠다.

내가 갔던 플로레아나섬과 산타페섬, 그리고 핀손섬은 바쁜 일정이라면 제외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스노클링이 제일 좋았던 핀손섬은 제외할 수 없는 것인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에서 교통편은 항공편을 13번이나 이용하여서 항공료가 많이 들었다.

승객이 적거나, 독점운항을 하는 몇몇 항로는 항공료가 매우 비쌌다.

4편은 출발전에 미리 예약을 했고, 일정을 확정할 수 없는 나머지는 현지에서 예매를 하였다. 

남미에는 철도가 발달하지 않아서 마추픽추로 가는 매우 비싼 관광열차 외에는 이용한 적이 없었다.

대신에 장거리버스가 발달하여 우리나라보다 좋은 것은 버스뿐일 것 같다.

아마도 항공편과 경쟁을 해야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우등버스보다 좌석과 서비스가 더 좋아서 아무리 장거리라 할지라도 큰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애초에는 물가가 저렴하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 이번 여행만큼은 취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남미의 음식이 맛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맛집을 찾아다니는 여행자라면 무슨 말이냐고 대들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먹는 것이라고는 고작 패스트푸드나 싸구려 음식이나 사먹고,

테이블보가 있는 레스토랑은 꿈도 꾸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러니 이해하시라.

 

그래서 돈도 절약할 겸 뒤늦게 취사를 하기로 했다.

내 습관대로 구하기 쉽고 편리한 참치매운탕이나 새우매운탕에 몇가지 밑반찬을 먹었다.

밑반찬은 상파울루, 부에노스 아이레스, 산티아고, 등의 한인촌에서 구입한 낙지젖갈, 창란젖갈, 고추절임, 껫닢, 등을 샀는데

보관이 문제라서 충분히 가지고 다니지는 못했다.

게다가 칠레국경을 넘을 때는 생물검색이 철저하다고 해서 식품을 가지고 넘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이 구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싶다. 식품을 소지한데로 신고하고 저지당하면 압수당하면 될 것이다.

현지에서 구입하여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이절임 정도 뿐이었다.

아무튼, 그래도 사먹는 음식보다는 입맛대로 해먹는 것이 더 좋았다.

 

아르헨티나에서 칠레국경을 넘어갈 때 검색견이 개코답게 나의 배낭을 찾아냈다.

많은 버스승객들 중에서 내 배낭만 문제가 된 것이다. 식품소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노우'라고 한 나는 불성실 신고자가 된 것이다.

젖갈과 실수로 다 먹어치우지 못한 천도복숭아가 한 개 있었는데, 그 천도복숭아가 문제가 된 것인 모양이었다.

벌금이 $300라고 했다. 국경검색이 엄격하다고 소문을 듣고 있어서 꼼짝없이 벌금을 물어야 하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해야 했다.

나는 깜박 잊어버리고 실수한 것인데 미안하다고 했더니 새로운 신고서를 한 장 내어주었다.

거기에 식품을 소지한 것으로 다시 작성하여 제출하라고 하면서 컴퓨터에 기록이 남으니까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다시 걸리면 그때는 벌금이 두배로 되어서 $600라 했다.

"휴!"

"아임 쏘리,댕큐, 댕큐!"

불쌍한 몰골로 구경 좀 하겠다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놈이라 좀 어여삐 보아준 것이 아닐까.

 

숙박은 물가가 조금 비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는 호스텔을 이용하였고,

칠레, 볼리비아, 페루, 갈라파고스 등에서는 주로 게스트 하우스의 싱글룸을 이용하였는데

여행할 때마다 도미토리나 이용하던 나는 비록 때로는 곰팡네 나는 싱글룸이기도 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호강을 한 셈이다.

이런데서는 대개 부엌을 이용할 수 있고, 없어도 객실에서 취사할 수 있었다.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친데 대하여 나는 감사한다.

어느 누구에도 감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에게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신에게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감사하는 것이다.

온유한 사랑은 어느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