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erranean 5

지중해5개국41-터키/앙카라Turkey Ankara)

박희욱 2009. 5. 18. 12:46

아침에 일어나서 자전거를 점검하니 뒷 짐받이 볼트가 풀려 있지 않은가! 미리 점검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2차적인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끈으로 동여메고 9시 10분 쯤에 출발하였다.

 

어제 오후 늦게 불었던 강풍도 없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두둥실 떠서 가끔씩 그늘을 만들어 준다.

길도 앙카라에 접근할 때까지 평탄하고, 땅이 넓은지라 상하행 분리 4차선이며,

노견의 폭도 넓고, 좌우로는 끝없는 평원이다.

 

점심은 휴계소에서 밥 두접시와 요리 1접시, 그리고 가져간 고추장에 양파와 고추를 찍어 먹으니 꿀맛이었다.

 

6시간 40분 동안 100km를 주행하여 오후 4시 쯤에 앙카라에 진입할 수 있었다.

호텔이 많다는 울루스 지역을 찾아가서 가장 허럼한 호텔에 들어가서 가장 싼 방을 달라고 하니까 15YTL이다.

그래도 국가의 수도라 30YTL 쯤 생각했는데 싸다. 그래서 방도 보지 않고 돈을 지불해버렸다.

방에는 세면기만 있을 뿐 욕실이 없고, 공동화장실에도 샤워는 없다.

항상 궁하면 통하는 법. WC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물통으로 물을 떠서 샤워를 했다.

 

100km를 주행했어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가까운 상가를 둘러보고나서 공원으로 갔는데, 넓은 공원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잔디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도네르 케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수퍼에서 벗찌와 살구를 사와서 먹었다.

 

 

 

 

 

호텔 옆 광장의 케말 파샤 동상. 그는 터키의 국부 즉, 아타 튀르크로 존경 받는다.

케말이라는 말은 어린 시절 너무나 똑똑하여 파샤의 선생이 붙여준 별명으로서

'완전한'이라는 뜻이고, '아타'라는 말은 아버지라는 뜻이다.

전국민으로부터 진심으로 존경받는 사람은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는 김일성과 함께 아타튀르크밖에는 없을 것이다.

모든 공공기관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거의 모든 도시에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화폐를 비롯한 곳곳에서 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마치 아타 튀르크의 나라처럼 느껴진다.

 

 

 

대학 졸업생들이 졸업행사의 일환으로 아타튀르크 기념관을 방문하는데. 애국심이 무척 고양될 것 같다.

 

 

 

 

아타 튀르크 기념관 - 케말 파샤의 업적을 전시해 놓았다. 한국인인 나조차도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터키의 건국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이 온 몸을 거기에 바쳤다.

어쩌면, 망해가는 오스만 터키 시절, 지금의 그리스 땅에 태어나 자라면서

그리스인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터키인에 의한 터키 공화국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받쳤다.

 

누군가가 아타튀르크에 비견할 한국 사람은 김구 선생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아타 튀르크는 건국을 하였는데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선생은 훌륭한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였지만 새로운 국제질서를 인식하지 못했다. 

굳이, 해방 이후 건국의 과정에서 가장 존경받아야 할 사람을 찾는다면 

한반도의 공산화를 저지하는데 실질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본다. 

 

 

 

 

 

500년의 역사를 지닌 위대한 제국 오스만 터키는 1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해외영토를 모두 서구 열강들에게 빼앗기고, 소아시아 반도조차도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미국지원) 등에게 침공당하여 2/3를 빼앗기는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오스만 터키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서구열강을 물리치고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나라를 건국한 케말은 비잔틴 제국 1,000년과 오스만 터키 500년 동안 수도였던

역사의 도시 이스탄불을 버리고 조그만 촌락이었던 앙카라에 수도를 정하였다.

그것은 새로 탄생한 터키를 새 부대에 담기 위한 것이었다.

즉, 수구세력의 저항을 막고 새 터키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개혁한 것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그 동안 사용했던 아랍문자를 버리고 알파벳을 도입한 것,

터키 전통 복장의 금지, 등으로서 터키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서구화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개혁이 엄청난 고독한 용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이 성공한다는 것은 낙타를 타고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알파벳 도입만 해도 그렇다. 이땅에는 한글창제가 600년이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한자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모르면서 한글전용을 반대하고, 자식들에게 한자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한국인인 나도 아타튀르크를 존경하는 것이며, 또 그런 인물을 가졌던 터키 사람을 부러워 한다.

그는 과도한 집무로 인하여 집무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니, 남의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아타튀르크를 함부로 김구 선생에게 비견해서는 곤란하다.

 

굳이 비견한다면 한국의 이승만과 박정희를 합쳐도 무게가 케말파샤쪽으로 기울 것이다.

고백컨데 내가 싫어했고, 그리고 증오까지 했던 사람들이다. 그렇게도 나는 세상을 볼  줄 몰랐었던가!

그렇다면, 지금도 세상을 제대로 못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상주의자를 싫어한다.

이상이라는 말조차도 혐오한다.

만일, 내가 이상을 가진다면 그대는 나를 존경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누워서 떡먹기보다 더 쉽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보기는 어렵다.

인류를 괴롭힌 자들은

현실주의자라기 보다는  이상주의자들이다.

 

 

 

 기념관에서 본 앙카라

 

 

 

 

 

 

 

 

 

 

 

터키라는 말은 돌궐에서 나왔다. 먼 옛날 우랄 알타이 지역에서 살았던 돌궐족이 여러곳으로 이동했다.

동쪽으로 이동한 돌궐족을 동돌궐이라 하고, 서쪽으로 이동한 돌궐을 서돌궐이라 하는데,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한 스탄(터키어로 땅이라는 뜻) 돌림의 국가들은

터키와 함께 모두 서돌궐의 일파로 보면 될 것 같다.

 

인종학적으로는 터키민족을 유럽인종과 아시아인종의 혼혈족으로 보는 것 같고, 문화적으로는 아시아민족인 것 같다.

그러나, 인종학적인 관점은 그럴지라도, 내 눈에는 서양인인데 약간의 아시아인의 모습이 비치는 정도로 보아진다.

어쩌면, 서양인이 보는 견지는 나와 반대일 수도 있다.

 

터키민족은 9세기 경에 동쪽으로부터 아나톨리아 고원을 통해서 소아시아에 진입하였다 한다.

그러면 그 전에는 소아시아가 비어 있었는가? 그럴리가 있는가.

서쪽은 그리스인, 남동쪽은 아랍인,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또다른 선민족이 있었을 것이다.

서기전 2,000년경에 융성했던 히타이트족도 몽골로이드에 가까웠다는 글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터키민족은 다 민족이 혼합된 민족인데, 언어적으로 터키어 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보면 될 것 같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소아시아라는 크다란 호수(백인)에 터키족(아시아인)이라는 강물이 흘러 들어와서 호수물과 강물이 혼합되었는데

강물은 자기의 색갈을 거의 잃고 호수물 색갈에 가깝게 변했지만,

호수내의 수류(바다의 해류에 해당하는)는 흘러던 강물의 에너지에 의한

수류를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 터키라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지만, 민족에게 있어서는 피보다 문화가 더 진한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유대민족이다. 유대인종은 이 지구상에 사라졌지만 유대민족은 아직도 굳건히 살아있다.

 

 

 

 앙카라 중심가

 

 

 

 

 중심가 근처의 공원

 

 

 

 

 

 

 

 

 

 앙카라 중심가

 

 

 

 

 어물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