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팔리아치

박희욱 2012. 4. 3. 20:55

팔리아치

 

집시 코메디 광대들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는 집시 유랑극단의 광대 부부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광대 카니오(팔리아초 역)는 코메디(연극) 공연을 앞두고 아내 넷다(콜롬비나 역)의 부정을 알아버린다.

정말 코메디 같이, 이 부부 광대는 다음날 아내의 부정을 줄거리로 하는 연극을 하게 되어 있었다.

 

비통한 심정이 된 카니오는 이미 관객이 들어찬 극장에서 연극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유명한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를 부른다.

 

이 비통한 심정에서 격분을 끌어안은 채,

아아. 넌 이렇게 공연을 해야만 하는구나!

너는 정녕 사람인가? 아니다... 광대다.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네 얼굴에 분을 발라라.

청중은 웃기 위해서 돈을 낼 것이다.

어떤 놈이 네 아내를 뺏어 갈 때,

웃어라, 광대여. 비록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네 가슴을 독으로 물들이는 고통을 비웃어 주어라!

 

 

주인공 팔리아치

 

 

연극이 시작되고 불륜의 장면이 무르익을 즈음 아내가 아래의 대사를 말한다.

"알레키노, 오늘밤이 지나면, 저는 영원히 당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숨어서 엳듣고 있던 남편 팔리아초는 이성을 잃고 뛰쳐나와서 소리친다.

"그놈은 누구야! 이름을 대라!"

 

관객은 광대모습을 한 팔리아초의 연기에 웃음을 터뜨리고,

넷다는 억지로 대사를 지어내며 끝까지 공연을 계속하려고 애를 쓰면서,

남편에게 그의 배역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팔리아초..., 팔리아초?"

팔리아초는 광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 한마디는 남편 카니오를 더욱 격렬한 분노로 몰아가버림으로써

그는 자신의 광대의상을 찢어 벗어 던지면서, "나는 이제 광대가 아니다!"라고 외친다.

팔리아초를 연기 해야 하는 카니오는 현실과 연기의 경계를 잃어버렸고,

이런 상황을 모르는 관객은 그의 연기에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친다.

 

분노가 극에 달한 카니오는 아내 넷다에게 그 놈의 이름을 밝히라고 거듭 소리치고,

이미 상황을 도리킬 수 없게 된 것을 안 넷다는 "나의 사랑은 당신의 증오보다 더 강하다!"라고 맞대응 한다.

결국, 관객들도 이것이 우스운 연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리면서 술렁대고 크다란 소동이 일어난다.

마침내 분노가 광기로 변한 카니오는 객석쪽으로 달아나는 넷다의 등에 칼을 내리쳐버리고,

객석에서 숨죽여 바라보다가 넷다를 구하려고 무대쪽으로 달려나오는 아내의 정부 실비오를 발견한 카니오는

"아아, 바로 너였구나, 너!"라는 외침과 함께 그의 가슴에도 역시 칼을 꽂아버린다.

 

무대는 넷다와 실비오의 피로 흥건히 젖어들고,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니오는 비통하게 외친다.

La Commedia e finita! 코메디(연극)는 끝났다!

카니오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고,

장렬한 음악이 무대를 마무리지으며 오페라 <팔리아치>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

 

이 오페라를 보면서 나는 군대시절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것은 37년 전, 일요일 저녁 점호시간의 일이었다.

 

우리 사병들은 주번사관으로부터 점호를 받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외출하였던 한 병사가 귀대시간을 불과 몇 분 넘기고서 내무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주번사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얼어버렸고, 뒤이어 문을 박차고 나가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냅다 뛰어서 위병소를 통과하여 그 길로 탈영하고 말았다.

 

그는 모대학 철학과에 재학중에 입대한 사람으로서,

평소 성격이 약간 낭만적인 것 같으면서도 히스테리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좀 절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탈영의 전력을 가지고서 우리 부대로 전출해 온 병사였는데,

취사장에서 거의 모든 것이 열외였던 취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통신병으로서 부대내의 전화교환 임무를 보고 있었는데,

탈영한 며칠 후 그로부터 부대로 전화가 왔고, 전화교환대에서 내가 그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기억되는, 그의 비장감이 서린 일성은, "코메디는 끝났다!"였고,

내가 한 마디도 하기 전에 끊어버렸다.

 

코메디라는 것이 군대생활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는지,

이제부터는 탈영병로서 쫓기는 자신이 비극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인지,

아니면 코메디 같은 인생이 끝났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팔리아초의 역을 하는 카니오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

 

오페라 <팔리치아>에서, 무대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코메디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동안에는,

연기자는 심각하지도 않았고, 관객들도 웃고 박수치면서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연기가 사실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상황은 돌변하여

극장안에서 연기자의 살인과 함께 관중들의 대소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

 

 

누군가가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인생은 연극이며, 그대는 그대 배역의 연기자이다

 

연기자는 자신의 배역을 충실히 맡아서 행위를 하지만, 아무리 연기에 깊이 몰입하여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의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연기자에게는 자신의 연기를 주시하여 쳐다보는 의식이 있다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배역을 맡고 있다 하여도 자신은 연기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웃는 배역이든, 우는 배역이든, 분격하는 배역이든, 또는 善역이든, 惡역이든

 

무슨 배역이든 간에 그 배역을 자신과 동일시 하지 말 것이다

 

연기를 하고 있는 연기자는 자신의 배역에 대하여는 결코 심각해 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서도 심각해 하지는 말아라, 비록 심각한 체하는 연기는 할지라도 심각하지는 말아라

 

 

그대는 그대의 인생을 살아가는 어떠한 한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인생을 연기하는 한 연기자이다

 

연기자는 항상 자신의 연기를 의식한다

 

그대는 어떠한 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자신의 연기를 의식하는 그 의식 자체이다

 

그대는 순수 의식이다,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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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영남이는 자신의 묘비명을

'웃다가 죽은 사나이'로 하겠다고 했다.

절대 심각해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근엄한 고승의 말보다도 훨씬 낫다.

그는 한국의 희랍인 조르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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