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나는 이 시에서 오묘한 '빛'이 아니고 왜 '힘'을 찾으라고 했을까 하고 의아스럽웠다.
진리가 빛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삶은 힘이 바탕이라고 할까, 아니면 힘이 더 본원적이라고나 할까.
진리도 빛이라기 보다는 힘이다.
삶과 진리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원의 빛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 질수록,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 진다면,
이 먹빛 마름 하는 날, 나는 그대를 잊을수 있겠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것이 돌려지지 않는다 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초원의 빛이여, 그 빛이 빛날때...
그대 영광의 빛을 얻으소서...
상기의 시는 내가 대학시절 보았던 영화 <초원의 빛>에 나오는 워즈워드의 시를 원용한 것이다.
서로 사랑했으나 본의 아니게 헤어지고,
그것으로 인하여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서 요양해야 했던 여자 주인공 윌마가
세월이 흘러서 각자 자신의 삶을 갖게 된 뒤의 어느날, 상대 남자였던 버드를 찾아간다.
거기서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들을 둘이나 가지고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버드와 담담하게 만나서 지난 시절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지난 시절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고,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한다.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윌마는 뒤돌아 선다.
그러면서 지난 시절의 아픔을 되새기고 눈물을 지으며,
고교시절 교실에서 공부했던 상기의 시를 되뇌이면서 윌마는 쓸쓸히 떠난다.
그 시절 이 영화는 나의 가슴을 저미게 하였다.
아마도, 나의 젊은 청춘의 시절을 윌마처럼 속절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간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 세삼스럽게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이 생각난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와 접촉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어쩌면 내가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것은 어찌 해도 문제가 아니다. 결국은 마찬가지니까.
그것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필연의 흐름이었으며, 그냥 그렇게 되어간 것이다.
말하자면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그런 한편, <영화 초원의 빛>에서 뒤돌아서는 윌마처럼,
생각하면, 아련한 미련 같은 것이 새벽 호수면에 이는 안개처럼 가슴에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음의 시는 원문<Splendor in the Grass>를 내 나름대로 번역해 본 것이다.
Splendour in the Grass
willam words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초원의 빛
윌리엄 워즈워드
한때 그처럼 눈부셨던 광휘가, 이제는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갔다 한들 달리 어찌하랴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때를 되돌릴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 빛과 영광의 뒤안길에 남은 것으로부터 삶의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본원적 동정과 연민속에서,
인간의 고통 속에서 솟아나는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체념속에서,
오랜 세월을 통한 생명의 지혜와
죽음을 넘어서는 우주적 신뢰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