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mir Highway

에필로그

박희욱 2017. 9. 9. 05:02

여행을 떠난다니까 어떤 친구가 즐거운 여행을 하고 돌아오라고 덕담의 메시지를 보내어서 나는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홀로 하는 여행이 무슨 즐거운 일이 있겠나, 그냥 힘들고 외로울 뿐이지, 

다만 그런만큼 감동도 깊고,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는 가질 수는 있지.'


정말, 이 답신은 내 여행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홀로 여행을 하였고, 그런만큼 즐거운 여행을 한 경우는 별로 없다.

즐거운 여행을 한 경우를 꼽으라면 배낭여행이었던 유럽미술관 여행과 미국동부 미술관여행 정도일 것이다.

미국동부 미술관여행도 열차와 버스에 자전거를 싣느라  12번이나  분해해서 포장하느라  지쳐서 1주일을 단축하여 조기에 귀국하고 말았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나의 삶과 나의 여행은 서로 비슷한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인생관과 나의 여행관이 유사하니까 내 삶과 내 여행이 유사할 수 밖에 없겠다.

나의 삶은 홀로의 삶이고,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별로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다.

특히 재미는 추구했다기 보다 오히려 경계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이가 좀 들고 보니, 

그런 내 삶의 태도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서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솔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덧없는 바람소리 같은 것이고,

나는 다만 그 바람소리를 듣고만 있는 존재일 뿐이다.

싫으나 좋으나 나는 나를 변형시킬 수 없으니 그 님에게 내맡길 수 밖에 없다.



*                 *                  *




Rabindranath Tagore




기탄잘리 1


당신은 나를 무한케 하셨으니 그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비우시고 또 비우시고 끊임없이 이 그릇을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넘어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당신 손길의 끝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기쁨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


당신의 무궁한 선물은 이처럼 작은 내 손으로만 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당신은 여전히 채우시고 그러나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                *                 *



내 여행에서 힘들지 않았던 여행은 없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은 하나의 익스피디션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여행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만큼 파미르하이웨이의 종착점 오쉬로 들어가면서 힘차게 페달을 밟을 때는 가슴북받히는 기쁨도 컸다.

이 여행에서 힘들었던 순간을  되돌아보면 스스로의 연민으로 눈시울 적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것이 모두 실존적인 삶의 순간들일 것이다.

아무리 즐겁고 재미있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런 순간이 없는 삶이란 마치 꽃이 피지 않는 무성한 관엽수 같은 삶이 아닐까 한다.


내가 어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겠나마는 일생을 편안히 마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삶이 그래서 그렇게 생각되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다 자기나름대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지 않을까 한다.

인생이 苦가 아니라면 어찌 부처의 죽음을 열반이라 할 수 있겠으며, 예수의 죽음을 어찌 승천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죽음도 그런 승천과 열반이 되기를 바란다.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아름다운 도로경관을 많이도 보아왔다.

그 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알래스카의 디날리국립공원, 미국 몬타나주의 글레이셔국립공원과 캐나다의 워터턴국립공원의 연결도로 17번,

콜로라도주의 로키마운틴국립공원, 와이오밍주의 곰이빨로드 등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노르웨이의 로포텐제도였는데 그것을 이번에 새로 갈아치웠다.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경관은 바로 파미르하이웨이였다.

자전거여행을 하고 싶은 곳은 아직도 여럿이 남아 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파미르하이웨이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다. 파키스탄의 카라코람하이웨이가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세상은 넓으니까 알 수는 없다.



유럽에는 이 파미르고원이 관광지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다.

파미르하이웨이를 관광투어를 하는 사람, 운전사와 차량을 렌트하는 사람, 지나가는 택시(택시의 개념은 돈을 받고 태워주는 합승차량)를 이용하는 사람,

오트바이를 이용하는 사람, 나처럼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 심지어 걸어서 하는 사람, 등 다양한 여행방법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자전거여행일 것이다.


출발할 때 말한 것이지만 여행은 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음식맛을 혓바닥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맛, 냄새, 온도, 시각, 촉감 등 종합적인 것이고,

심지어 중동 사람들은 손가락으로도 음식을 맛보지 않는가.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이야기지만 해방전에 미국의 맹인 헬렌켈러도 김기창 화백과 금강산에 올라가서 그 아름다움에 놀라더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맹인들이 몽골에 여행가서 대평원의 아름다움을 알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이 파미르고원을 자전거로 횡단하는 동안에 그것이 나에게는 과분한 행운인 것으로 여겨졌다.


호로그에서 오쉬까지의  여로에서 동행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였으나 무망한 것이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주행하는 사람이 하루에 5~6명 정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주행하는 사람이 2~3명 정도 인 것으로 보였다.

예상보다 자전거여행자가 적었고, 많다 할지라도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라 내가 보조를 맞출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실재로 주행해 보니까 홀로가 자유로워서 굳이 동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홀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가.

하루의 주행을 마음내키는 대로 시작할 수 있고,  사진촬영을 많이 하는 나는 마음내키로는 대로 자전거를 정지하여 사진을 찍고,  

마음내키는 대로 하루의 주행을 마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굳이 동행을 할 이유가 없었다.

외로움도 주행 중에는 경관을 보고 사진을 찍느라고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될 수 없었고, 주행을 마친 후에도 몸을 씻고 식사를 한 다음에 곧 바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서둘러 출발준비를 했으니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을 시간도 별로 없었다.


이번의 파미르하이웨이에서 만난 자전거여행자는 미국 유타주에서 왔다는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유럽인들 뿐이었다.

프랑스인이 절대 다수였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네달란드인이 아주 많았다. 농담삼아 너희 네델란드 사람들은 돈을 벌면 모두 여행하는데 쓰느냐고 했더니

그런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인구수 대비로 본다면 네델란드인이 가장 여행을 좋아하는 나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지평선과 수평선만 보고 살다가 산을 보면 미칠 것이다.

그외에 영국인, 스페인인, 벨기에인 등이 눈에 많이 띄었고 슬로베니아인,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러시아인이 제법 많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장화같이 생긴 국토 속에서만 만족하는지 해외여행을 즐겨하지 않는 것 같다.

해외여행객수로 본다면 독일인이 최고로 많을 것이지만 파미르하이웨이에서는 예외였는데 

알고보니 독일인은 타지키스탄 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나처럼 홀로의 자전거여행자는 별로 없고 거의 대부분이 커플이었다. 자전거여행이 아니더라도 서양인들은 대개 커플 단위로 여행한다.

이런 경우에도 서양인들의 개인주의 행동양식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절대 다수가 유럽의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출발해서 여기 파미르하이웨이까지 오는데, 대개 7개월가까이나 소요된다고 했다.

그러니 동성끼로 온다면 중간에서 서로 다투어서 찢어지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런 힘들고 피곤한 긴 여정에서 동행자와의 갈등을 참고 지낼 자신이 없다. 
그들은 유럽에서 출발하거나, 두샨베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중앙아시아를 한 바퀴 돌거나 하지
파미르하이웨이만 여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나는 비박과 취사준비도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파미르고원에서 딱 두번 비박을 했는데, Akbytal 고개 아래와 타지키스탄측 검문소 아래에서였다.

Akbytal 고개를 넘을 때는 고개 아래까지 주행했다가 지나가는 택시로 민박집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음날 역시 택시로

전날 주행을 중단했던 위치로 돌아가서 자전거주행을 시작하면 비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타지키스탄 국경을 넘을 때는 카라쿨에서 새벽같이 일찍 출발을 하면 국경너머에 있는 민박집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검문소에 도착해서 1박을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돈을 주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민박집(homestay)의 숙박료는 $10로 보면 되고 저녁과 아침식사는 포함된다.

점식을 매식할 식당은 찾기가 어려워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음식에 별로 욕심이 없는 나는 비스켓이나 스니커스 같은 간식으로 떼우거나,

난을 준비해서 버터를 발라 먹었다. 음식에 까다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여행은 엄두를 내지 않을 것이다.

잠자리와 음식에 까다로운 사람은 인생이 까다로울 수 밖에 없고, 그런 인생이 과연 즐거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잠자리와 음식에서 해방된다면 인생 또한 자유스러울 것이다. 그런 분이 두샨베에서 만났던 변광수 사장 같은 분이 아닐까 한다.

이런 식으로 비박과 취사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장비는 기본장비 외에 추위에 대비한 의류만 있으면 될 것이고,

그러면 앞패니어와 트렁크백이 불필요해지고, 뒷패니어만 있어도 됨으로써 가벼운 자전거주행이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할 것이다.


해외에 자전거여행을 가면 내 자전거가 최고다. 내 자전거보다 더 비싼 자전거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번처럼 MTB 를 가지고 갈때도 그렇고, 여행용자전거를 가져갈 때도 그렇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살펴보니 카본프레임은 아예 없고, 

한국의 동호회에서라면 눈을 딱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앞샥도 없는 철티비도 눈에 많이 띄였다.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한국은 아마도 세계최고의 고급자전거 소비국가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자전거 깜장야크는 봐 달라, 왜냐하면 한국의 엠티비 동호회에서는 최하급에 속하는 것이니까.

모두다 알다시피 이런 것은 비단 자전거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인들은 대개 실존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같다. 반대로 말하면 소유적인 삶을 살고 있다.

공론에 집착하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실용적이고 실질적이지 못하고 명분에 집착하고 체면에 집착한다.

그런 체면이 사회적 윤리도덕에 기초한 것이라면 좋을 것이지만 유교의 입신양명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남과 비교하게 되고, 그 비교는 심한 경쟁사회를 만들어 낸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가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해외에 나가도 한국교민들은 죽기살기로 서로 경쟁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렇게 명분과 체면유지를 위해서 인생을 공허한 것에 소비하는 경향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웰빙이라는 개념도 그렇다. 한국인들은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차를 가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호텔에서 지내는 것, 등을 웰빙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것은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웰해빙(well-having)이다.

웰빙은 글자 그대로 well-being 즉, 잘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well-having의 반대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반도가 그런 웰해빙의 문화에서 탈피하려면 아직도 많은 세월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릴 때는 몰랐지만 대한민국은 진짜 새나라이다. 어린 나라라는 말이다.



애초에는 65일간의 여정으로 파미르하이웨이와 키르키스스탄을 여행하려고 했다가 부득이 하여 44일로 줄어드는 바람에

타지키스탄의 호로그에서 키르기스스탄의 오쉬를 거쳐서 곧 바로 600km 정도 떨어진 비쉬케크까지 여행하려고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8월 11일에 오쉬에 도착하고 보니 귀국일 29일까지는 시일이 많이 남아서 애초에 계획했던 

카자르만, 나린, 송쿨, 코치코르 등지를 차량을 이용하여 여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몸살과 감기에 걸려서 몸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그 여행은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대단한 파미르고원의 풍광을 보고나니까 키르기스스탄 여행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사리타쉬나 오쉬에서 마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 여행이 비록 불편했다 하더라도 가본 것과 안 가본 것은 값어치가 다르고, 

대체로 세상일은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오쉬에서 톡토굴을 경유한 비쉬케크까지의 루트는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두샨베에서 호로그까지의 약 600km 구간은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대단한 경관이었다. 

다만 비포장 도로에다가 만만치 않은 고개를 넘어야 하고, 먼지를 상당히 마셔할 것은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이 구간의 경치에 매료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비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서양인들은 대개 이 구간을 놓치지 않았다.

일정이 충분치 못한 사람이라면 호로그에서 사리타쉬까지만 여행하여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이번 여행의 최고의 선물은 사리타쉬에서 사리모굴을 거쳐서 레닌봉 BC에 다녀온 것이다. 

그렇지만 자전거 여행자는 좀처럼 여기에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여기는 파미르하이웨이에 속하지 않고, 사리타쉬에서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차량 여행자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자전거로 여행하면 동일한 길을 힘들여서 되돌아나오기는 아주 싫어진다. 

정말이지 그곳은 신들의 정원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그 정원지기는 내가 자전거로 그곳을 침범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신들로부터 쫓겨났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러나 차량으로 들어가는 것과 자전거로 들어가는 것에는 그 감동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루트를 동쪽에서 서진할 것이냐, 아니면 서쪽에서 동진할 것이냐를 놓고 생각을 많이 하였다.

경험을 해보니까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동쪽에서 출발하여 서진하는 것이 좀 더 편할 것 같다.

우선 경사도를 생각해보면 그렇고, 내가 경험한 풍향을 보아도 그렇다. 

다만, 이 경우 사리타쉬에서 타지키스탄 국경을 넘을 때까지의 험악한 비포장도로의 급경사는 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내가 여행을 조금 해본 결과  인간이라는 동물은 근본적으로는 대체로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거기다가 현미경을 갖다댄다면 달리 말해야 하겠지만.

타지키스탄과 키르키스스탄의 국민소득은 $1,000~1,200 달러에 불과하다. 그래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2배에 달하기는 하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하면 한 국가의 수준, 이럴테면 정치, 윤리도덕, 사회질서, 국민의식 등의 모든 수준이 소득수준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6.25 직후와 60년대까지는 국민소득 $80달러의 수준으로서 지금의 중앙아시아 이상으로 무질서한 나라였다. 

공중도덕과 염치는 없고, 도둑과 강도가 들끓고, 폭력과 욕설이 횡횡하였다.

대한제국 멸망사를 읽어보면 그 당시의 한국은 국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사회였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어디서 훔쳐다가 붙인 것 같았다.


국민의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 길은 국민소득을 향상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백날 공자왈 맹자왈하면서 윤리도덕을 교육하고 고취시킨다 한들 헛수고이다.

옛부터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는데, 지당한 말씀이다.

대한민국이 그나마 지금처럼 민주화가 되고 질서가 잡힌 것은 오로지 경제수준의 향상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자신들의 공으로 여기고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착각이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팔을 치켜들고 흔들지만 실재로는 돈을 을 먹고 자란다.

이것을 부정하고 싶으면 중동과 러시아, 중국 그리고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경제가 빈약한 나라를 보면 자명해진다.

그런 나라에 가서 백날 민주화 운동을 해보라. 백년하청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국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보다는 경제발전에 공헌하는 시진핑이가 국가의 장래를 보아서 더 유익한 사람이다.


자유니, 평등이니, 민주니 하면서 어떤 이념을 가지고 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인류역사에서 어떤 이념이 사회를 변혁시키거나 개혁한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새로이 변형된 역사적 사건을 이념을 가지고 그를듯하게 해석할 뿐이다.

이념은 생각에 불과한 것이고 세상은 인위적인 생각으로는 변혁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귀국을 해서 자주 다니던 수재비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동안에 식당의 바닥이 테이블로 바뀌어 있었다.

왜 바꾸었나고 물어 보았더니, 젊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신발을 벗어 놓으면 

들고 가거나 의도적으로 바꿔서 신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골머리를 앓는다는 것이다.

좀 의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였던가!


언뜻 이것이 한국의 어려운 경제실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두려움이 벌떡 일어났다.

나의 어린시절 60년대의 경제사정과 사회실상이 겹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쌀독에 쌀이 떨어지면 인심이 흉흉해질 수 밖에 없다. 쌀독에 바닥을 보이는 흥부는 결코 인심을 쓸 수 없고, 

창고가 가득한 놀부가 아무리 심술궂다 해도 발바닥에 진흙을 뭍히면서까지 남의 밭에 들어가서 호박에 말뚝을 박을 이유가 없다.

털도 없는 제비새끼가 땅에 떨어지면 흥부같은 자들은 대개 된장에 발라서 목구멍으로 삼켜버린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쩌겠나.


경제가 무너지면 그 잘난 민주화도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다. 도로아미 타불이다.

사회가 무질서 해지고 부정과 부패가 다시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켜게 된다.

지금의 정치권이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상황이 도래할까 싶어서 두렵다.

나는 신문도 보지 않고 TV뉴스도 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눈치는 있다.

나의 기우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천만다행이다. 



9월 26일 귀국하자 마자 사진을 정리해서 포스팅을 하기 시작에서 오늘 이 에필로그를 작성하는 것이 10일이니 약 2주간의 시일이 소요된 셈이다.

그런 노력을 왜 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포스팅을 하면서 그때의 생각과 감흥을 다시 살리고 사진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

이 블로그가 없다면 나의 여행은 창고속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잡동사니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꺼내 볼 수가 어렵게 될 것이다. 기억속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앞으로도 힘든 여행을 계속하겠지만 이번만큼 힘들게 여행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감사한다, 이번 파미르고원 자전거여행의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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