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행복의 정복

박희욱 2019. 7. 19. 11:59

나는 이런 류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으려 했는데도 불구하고 2권을 샀다.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다.

확실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 황문수와 이순희 번역의 2권을 샀던 것이다.

결국은 두 권 모두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저자의 잘못인가? 그럴리가 없다.

번역자의 잘못인가? 나보다 훨씬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다.

결국 독자 즉, 내 잘못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는 KBS 제1FM에서 나오는 아나운서 멘트 때문이었다.

러셀의 말 즉, '우유부단하기 보다는 차라리 실패를 선택하라'

이 말에 내가 이끌린 것은, 뒤돌아보면 내 자신이 우유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햄릿 스타일의 성향이었으니까.


그 멘트가 없었다면 이 책을 읽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에 내 사전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버리기로 했다.

미래에 내가 행복하게 살아갈  길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후에 아내에게조차도 당신의 행복을 내게 의존하지 마라고 하는 매우 독한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행복할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는가.


1872년에 태어나서 1970년에 사망한 버트런트 러셀은 20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운다.

다방면에 걸친 수많은 저작을 남겼고, 수많은 강연을 했으며,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천재였다.

나는 학교시절에 그의 '철학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끝내 다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 당시에는 철학을 신뢰했고, 철학이 길잡이가 되어서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믿었다.


러셀은 2살 때 어머니를 잃고,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얼마후 조부도 잃고, 결국은 조모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그는 이미 5살 때에, 70살 때까지 살아가야 할 인생이 무척 권태로워 보여서 삶의 의욕을 잃고서 자랐다고 하니 대단히 조숙한 천재였슴에 틀림없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만 받았다.


그는 말한다.

나는 청년시절에는 삶을 증오했고,

늘 자살의 유혹에 시달렸지만 수학을 좀더 알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그위험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 책을 저술할 때 56세였다)은 삶을 즐기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삶을 더 즐길 수 있다라고.


러셀은 22세 때 조모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5세 연상의 여인과 결혼했으나

10년간의 별거 끝에 49세 때 다른 여인과 재혼하였다.그러나 또, 64세 때 이혼하고 곧 재혼을 하였다.

그 이후 80세 때 또 이혼을 하고 곧바로 다른 여인과 결혼을 했으니,

결국, 세번 이혼하고 네번 결혼한 다음에 이혼의 끝을 맺은 것이다.

그의 이른 나이에  7살 연상의 여인과 초혼을 한 것은 모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연 그가 그의 말대로 행복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마는 그의 행복을 믿기가 어렵다.

이혼이라는 것이 긴 고통없이그렇게 간단히 결행할 수 있는 것인가?

첫 결혼은 행복했겠지만, 재혼, 삼혼이 그렇게 행복하기만 한 것일까?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의시민이라고 느끼며,

자유롭게 우주가 주는 장관, 우주가 주는 환희를 즐기고 또한,

자기를 뒤이어 오는 사람들과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에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때, 우리는 가장 큰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기가 매우 어렵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말은 매우 사념적이고 공론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력에 나타난 활동을 보아도 무척 공상적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의 주전공은 수학이다. 그래서 세상을 논리적인 수학으로 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2+2=4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근 170페이지를 할애할 수 있는 철학적 수학자이다.

세상에 논리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물리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논리를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서 세상살이에 적용하려고들면

해악을 범하고 만다. 좌파적 인간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물론 영리한 좌들은 매력적인 좌파사상으로써 군중을 유혹하여 권력을 잡는다.

러셀도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세계적 석학을 향하여 나같은 일개 범인이 그를 비판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일지 모르지만 할말은 해야겠다.

그는 말을 이용하여 사념놀이를 하는 것 같고, 그런 말을 팔아서 살아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살아서 대단한 영광을 누렸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사상이 현시대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의 공론적인 정신적 성향은 공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적으로 개인교사에 의한 사교육에만 의존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행복의 정복!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햇빛 아래에서 그림자를 떼겠다는 말과 같다.

행복이란 것 또한 결코 이원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행은 행복의 그림자이고, 그림자 없는 행복은 없다.

소위말하는 성자들 중에서 과연 행복을 논한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는 진정한 성자가 아니다.


그가 과연 행복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고나 있을까?

차라리 행복이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진실하다.

행복에 촛점을 맞추면 안된다.

그것은 마치 야간에 어떤 물체를 보려면 그 물체에 촛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촛점을 맞춰야 하듯이 해야 한다.

즉, 행복은 명소시가 아니라 암소시의 적용을 받는다는 말이다.


나의 사전에는 행복이란 없다, 행복해지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모르겠다.


나는 일찍부터 재미를 위한 독서는 사실상 없었다.

지식의 축적을 위한 독서는 흥미를 잃은지 오래다.

남은 것은 나 자신의 각성을 위한 독서이지만, 그런 책을 만날 희망은 점점 없어져 가는 것 같다.

그것은 나의 사고가 너무 굳어버려서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을 구입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의 사고의 틀을 변형시킬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나의 한계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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