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성리학은 이씨조선 왕조의 유지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성리학이 조선을 완전히 신분제사회로 만들어서 백성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백성들은 스스로 군토, 즉 임금의 땅을 빌어먹고
산다고 했다. 그래서 노예제 연구가인 경제학자 스탠리 엥거만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조선시대의 노예제도를 언급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도라고 했다.
즉, 동시대에 조선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의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 등 피정복지의
이방 민족이었는데 반해, 이씨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이씨조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매우 유사하다.
감옥살이나 마찬가지인 북조선 인민들은 사실상 공산당의 노예나 다름없다.
내가 아는 성리학은 세상을 이(理)와 기(氣)로 분별해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했다.
理와 氣에 대한 설명은 모르긴 해도 학자들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내가 말한다면
理는 사념이나 사상 쯤 되겠고, 氣는 존재라 할 수 있겠다. 혹자는 그 존재를
현상세계, 즉 물질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율곡의 이기일원론도 있지만,
한마디로 하자면 理는 氣의 신기루일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理는 氣, 즉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만물을 理와 氣로 분별하는 것은 학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범주화의 오류다. 어쨌거나 성리학은 세상만사를 범주화하고
분별하는 습관대로 백성을 분별하였고 그것이 이씨조선사회를 철저한 신분제사회로
만들고 말았다. 마치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양반, 중인, 노비, 천민 등으로 엄격한
신분사회가 되어서 신분상승의 기회는 전혀 없었다. 이것이 조선사회를 아무런
발전도 없는 죽음의 사회로 만든 것이다. 인도는 아직도 카스트제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한반도가 그런 신분사회의 굴레를
일찍 벗어나게 해준 것이 일제였다. 이것만 해도 일제에 감사할 일이다.
아무튼 성리학은 이씨조선을 철저한 계급사회로 만들었다. 신분, 성벌, 연령,
가족관계, 등에 의한 철저한 계급사회로 만들어서 백성을 자신의 신분에
안주하게 만든 결과 전혀 발전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귀국하던 명군 사령관
이여송은 선조에게 주자학, 즉 성리학을 버리고 양명학을 할 것과 노비제도를
정비하라고 충고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여송은 이씨조선이 성리학과
노비제도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달구지같은 국가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씨조선은 성리학과 노비라는 두 바퀴를 제거하고서는 굴러갈 수 없는 달구지였다.
백성들 중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25%~50%였던
것 같다. 나머지는 중인과 각각 5~10%의 양반과 천민으로 구성된 사회였다.
(1858년의 노비는 31.8%)
문제는 이 노비근성이 한민족에게 아직도 유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비는 항상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산다. 책임의식이 있을 리 없고 시키는 일만
적당히 하는 척하면 된다. 주인이 질타를 하면 변명하고 거짓말할 궁리를 해둔다.
한국인들의 거짓말 근성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양반들은
국가의 관리는 중인들에게 맡기고, 생산은 노비들과 천민에게 맡겼으며,
자신들은 책이나 읽는 척하면서 청빈락도를 읊으며 지냈다. 유럽의 귀족은
고급스런 예술문화를 남겼지만, 이땅의 양반들이 남긴 유산은 허례허식 뿐이다.
이러니 국가는 지구상 최빈곤국 수준이었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이땅에 남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유적이다. 만일 외국인이 한반도땅에 있는 볼만한 유적을
소개해 달라고 하면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지독한 계급사회의 흔적이 한국어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즉, 세계최고로 발달한
경어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영어에서는 'go'라는 단어에는 신분에 따른
어미변화가 전혀 없다. 한국어는 어떠한가? '가', '가라', '가거라', '가시라'', '가시게',
'가시오', '가세요', '가십시오', 가시옵소서' 등등, 층층히 위계질서에의한 언어다.
틀림없이, 한국어를 배우면 외국인이라면 모두가 기겁할 것이다.
내가 얼핏 본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에는 경어체가 전혀 없었다.
좀 과한 말로 들리겠지만 한국어는 노예의 언어다. 최근에 들어와서 치열한
경쟁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요즘 거북스럽게
들리는 말이 '어르신'이다. 예전에는 '어른'이라고 했던 것이 격이 더 상승되었다.
내게는 아부성 언어로 들린다.
무속신앙은 북과 춤으로써 푸닥거리를 했다면, 성리학자들은 책과 붓으로써
푸닥거리를 한 셈이다. 바야흐르 둘다 이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성리학이
이땅의 민족성에 남긴 흉터는 크게 남았다. 말할 것도 없이 양반의 허례허식과
노비의 노예근성이 그것이다. 노예근성의 인간관계는 위계질서에 의한 인관관계이기
때문에 상호존중의 인간관계일 수가 없다. 서양에서는 부모한테도 이름을 부르지만
한국인들은 나이가 동갑인 친구가 아니면 이름을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사장님, 회장님, 부장님, 사모님, 형님, 선생님, 등등이 이름을 대신한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상호존중정신이다. 한국인에게는 이런 정신이 심히
결여되어 있다. 이런 풍토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갈밭에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심었던
국부 이승만의 후광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치풍토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이땅의 숙명이고 운명인 것을!
*조선의 성리학과 북조선의 주체사상을 학문적으로 비교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이 자가 소유했던 노비가 367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