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erranean 5

지중해5개국27-시리아/팔미라1(Siria Palmira)

박희욱 2009. 5. 14. 10:14

5월 9일

아침일찍 Ghazal호텔을 나서는데 입구 종업원은 본척만척한다. 주인은 역시 종업원을 잘 두어야겠다.

버스터미널은 호텔에서 6km인데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팔미라까지는 100파운드, 자전거도 100파운드란다. 항의를 했더니 150파운드 내란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매니저가 단호한 표정으로 200파운드에서 깍을 수 없단다. 재수없는 놈이다.

자전거 운반비를 지불하면 좋은 점은 그만큼 자전거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황사로인하여 하늘이 희끄므레하다.

다마스크스에서 팔미라까지 250km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메마르고 황폐한 사막이다.

때때로 황사가 심하게 불기도 한다.

우리 조상님들은 정말 좋은 곳에다 터를 잡았다.

 

단돈 4,000원으로 240km를 2시간 40분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 황량한 사막의 황사바람 속으로 자전거로 주행한다면 소요날짜 이틀에 먹고 자고 하는 비용이 또 얼마이겠는가!

터미날에 도착하니 호텔 호객꾼이 자전거를 결합하지 말고 자신의 승용차에 실어란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다른 호텔선택이 어려워지고 가격흥정이 불리해진다.

그래서 자전거로 그의 차를 쫓아갔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탈리아를 경유하고 선박을 이용해서 터어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을 통해서

여기까지 오트바이 여행을 하는 독일인 2명이 투숙하고 있었다.

 

가이드북에 있는 팔미라에 대한 설명을 옮겨본다.

광대한 사막의 오아시스에 약 16먄평에 달하는 유적이 펼쳐있는 신비의 도시,

팔미라의 역사는 AD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역사의 시련과 지진을 거친 후 1930년대에 와서야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워낙 방대한 유적이라 아직도 복원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영국의 여성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곳에 매료되어서

"뜨거운 모래사막 한가운데 땅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환상적인 도시 팔미라"라고 묘사하였다.

중동에서 페트라와 더불어 최대관광지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곳으로 해질녘

아랍성에서 바라보는 팔미라 유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다.

 

팔미라는 AD3세기 초에 로마의 속주가 되고,

AD260년에 왕위에 오른 오데나투스2세는 위대한 로마제국을 제대로 알아 보았는지

로마에 협조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로마로부터 오리엔트 통치권을 얻었다 한다.

그리하여 팔미라의 최고 전성기를 누리다가 그가 의문의 암살을 당한 후,

어린 아들을 대신한 왕비가 실권을 장악한 다음에 주변으로 통치세력을 넓혀가면서 콧대도 높혀갔는데,

이것이 로마제국의 눈밖으로 나가게 되어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이곳을 함락하고

자칭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던 왕비를 로마로 압송한 다음 본보기로 이곳을 폐허로 만들었고,

남은 유적도 1089년에 지진으로 파괴됨으로써 모래에 묻히게 되었다 한다.

아마도 그 왕비 제노비아는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던 모양이다.

 

제노비아의 운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로마 압송중에 병들어 죽었다는 설과,

로마에 도착하여 로마 원로원 인사와 재혼하여 잘 살았다는 설이다.

나는 후자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왜냐하면 자칭 팔미라의 클레오파트라라 할 정도로 미모의 여인이었으므로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처럼 용서받고 잘 살았을 것 같다. 아니다.

그녀의 성질로 봐서는 끝까지 곳대를 높이다가 죽었을 것이다.

 

여장을 풀고 자전거를 타고 팔미라 유적지로 향했다.

유일하게 로마군의 파괴를 면했다는 벨신전은  지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청동걸쇠 그 자체가 유적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았다.

유적이 문외한인 내 눈에는 요르단의 제라쉬와 비슷해 보였다.

다만, 도시자체는 훨씬 더 넓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유적지였다.

황제의 명령으로 망치를 내리쳐야 했던 로마군의 심장은 뛰고 팔은 떨렸을 것이다.

아마도 파괴의 망치를 들기 전에 술로써 취하지 않고서는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에는 이곳이 얼마나 화려하고, 영광스러우며, 장엄한 곳이었을까!

아직까지도 그때의 여운이 역역하게 남아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당시의 장인들의 예술적 감각과  조각기술이 놀랍다.

복원의 손길이 조금 들어갔지만, 앞으로 좀더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유적지가 워낙 커서 엄청난 경비와 학술적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시리아 사람들이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뒷산에 올라 쳐다보니 넓은 유적지의 좌측에는 지금의 도시가 보이고 그 너머에는 넓은 오아시스가 펼쳐저 있었다.

유적 관광을 마치고 오아시스쪽으로 들어가봤다.

드넓은 오아시스를 기대했는데, 좁은 길의 양측을 토담을 쌓아 놓아서 골목길같은 느낌을 주는 길밖에 없었다.

오아시스의 모든 토지가 개인소유지로 분할되고

그것이 토담으로 둘러쳐져서 매우 답답한 오아시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젊은 친구가 자전거로 자신의 농장에 있는 농막으로 안내해서 구경을 시켜주었다.

염소치는 곳으로도 안내했는데, 새끼 염소들은 단 10cm도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이

붙어다니면서 부지런히 풀을 뜯었다.

런데 그 풀이라는 것이 길이가 3~4c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조차도 띄엄띄엄 자라기 때문에 언듯보면 맨 땅바닥을 훝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사람들은 염소를 이용하여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미소량의 에너지를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샘물이 솟아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이제는 그러한 것을 볼 수 없단다.

지금은  지하수가 부족해서 땅속 400m까지 파내려가야 한단다.

펌프로 지하수를 퍼올린 결과다.

기계문명이 하는 모든 짓처럼 보여서 가슴이 저민다.

어느날 지하수가 말라서 고갈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그 옛날 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담맘에서 보았던 지하수가

냇물처럼 펑펑 쏟아져 나오던 그 오아시스의 샘물은 지금쯤 어떻게 되어있을까!

 

돌아온 호텔입구에서 다마스커스에서 만났던 김태우군을 다시 만났다.

그는 6개월간 이스라엘 키브츠에서 일하고, 4개월의 시간을 내어서 세계여행을 하고 있단다.

 

 

 

 생을 마감하고 땅속으로 가는 길.

 살아 생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관을 메어주면서 따라갔다.

 

 

 

 

 

 

 

 

 

 

 

 

 

 

 

 

 

 

 

 

 

 

 

 

 

 

 

 

 

 

 

 

 

 

 

 

 

 

 

 

 

 

 

 

 

 

 

 

 

 

 

 

 

 

 

 

 

 

 

 

 

 

 

 

 

 

 

 

 

 

 

 

 

 검은 구멍들이 지진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걸쇠를 밖았던 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