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온 글

한자의 비능률

박희욱 2011. 3. 4. 06:51

한자는 왜 비능률적이냐?

 

석인 정 태진 선생의〈한자 안 쓰기 문제〉에서

 

(……) 그러면 한자가 비능률적인 원인이 과연 어디 있느냐?

(1) 첫째로, 한자는 자수가 많은 것이다. 세상에 한자의 수효만큼 많은 글자를 가진 나라는 다시는 없는 것이니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말을 만들고 있는 중에 저 중국인들은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 자전에 있는 글자가 약 오만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글자가 많은 까닭으로 그들은 이 글자를 배우노라고 기막힌 애를 써 왔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글자의 수효는 무제한으로 자꾸 늘어 가는 것이니 근래에 중국에서 만든 글자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圖書館        =Ping

       =國               =Pong

     =Helium

또, 조선에서 만든 한자로는

    畓 乭   乫         呑     柶   桐 椧

따위가 있고, 일본이나 안남(安南, 베트남)에서도 그들 나름대로 한자를 상당수 만들어 쓰고 있다.

이와 같이 제한이 없이 때때로 늘어 가는 한자는 그 자수가 늘어 감에 반비례하여 능률은 점점 퇴보되는 것이요, 이와 같이 자수가 많은 관계로 인쇄하는 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며, 자전 찾기에 곤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타자기를 이용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2) 둘째로, 한자가 비능률적인 이유는 그 자획이 대단히 많은 까닭이니

    鼈   驩 鸚 驪 鶴 鸞   癲         鑽 躪

    轟 纜 齷 驟 欖   纛   鑿 艶 鬱   鬚 囑

따위의 글자를 보라. 이와 같이 획수가 많은 글자를 기억하기에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고생을 할까? 특별히 획수가 많은 글자로 이름을 가진 어린이가 그 이름ㅅ글자를 쓰기를 배우노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는가? 획수가 적은 글자로 이름을 지어 가진 아이들은 일찍부터 자기의 이름을 쓸 줄을 알지만 획수가 많은 아이는 제 이름을 쓸 줄을 몰라서 여간한 고통과 수치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린이들의 이와 같은 고통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자의 획수가 많은 까닭으로 고통을 받는 이는 어린이뿐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한자를 배우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받는 고통이 이 고통이다.

일본의 어떠한 심리학자가 수백 자의 한자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글자를 쓸 수 있는 힘을 조사하여 본 일이 있는데, 그 결과로 발견된 것이 다음의 사실이다. 곧 "자획이 많아짐에 따라서 성적은 점점 나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계에서 획수가 많은 한자를 사용하는 국가가 비문화적이요 비능률적일 것은 또한 정한 이치가 아니냐?

(3) 셋째로, 한자어에는 동음이의어가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니 이것이 한자를 비능률적으로 만든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자성-自省 子姓  盛 資性  星 慈聖 磁性 雌性

    대사-大祀 大事 大舍 大師 代射 代謝 臺詞 臺 

    연화-軟化 煙火 煙花 緣化 蓮花 鉛華

    자수-自手 自首 自水 自修 刺繡 紫綬  鬚

    명사-名詞 名士 名辭 螟嗣 鳴謝 銘謝 明査 鳴沙 明沙

    경전-經典 經傳 輕箭 京錢 競傳

    급사-急事 急死 給仕 給事 給使 及瀉

이와 같이 동음이의어가 많은 까닭으로 결국 이러한 말들은 "눈의 말"은 될지언정 "귀의 말"이 되지 못하여 실제 생활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 나라 말에도 눈(目, 雪), 다리(脚, 橋), 발(足, 簾) 따위의 동음이의어가 있고, 일본말에도 ハシ(橋, 箸, 端), アメ(雨, 飴), カキ(枾, 垣, 牡蠣) 따위가 있고, 영어에도 Bank(銀行, 堤防), Spring(春, 泉, 跳躍, 起源) 따위의 동음이의어가 있으나, 한자어에 비하면 그 수효가 매우 적은 것이다. 중국사람 자신으로는 사성, 오성, 칠성, 팔성 따위의 구별로 이 복잡성을 다소간 완화시킨다고 하지마는 중국사람이 아닌 우리에게는 또한 어떠한 방법도 없는 것이다. 지방에 따라서 자음의 장단으로 다소의 구별을 할 수가 있다고 하지마는 이것은 문제ㅅ거리가 되지 아니한다.

(4) 넷째로, 한자어에는 이자동의어(異字同義語)가 많은 것이 한자를 비능률화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오징어-烏賊魚 墨魚 纜魚  魚 烏 

    지렁이- 蚓       土龍 地龍 土龍子 地龍子

    돌ㅅ비눌-雲母 地  貝石 雲砂 雲珠 雲英 雲華 雲膽  石 千層紙 金星石

    율무쌀-薏苡仁 玉珠 米仁 米珠 起目 芭實 感米 屋  薏黍 葡蘆 有乙梅 回回米 草魚目 草珠兒 薏米仁 薏珠子 珠子米

    끼무릇-半夏 半下 水玉 地文 和姑 示姑 守田 雉毛邑 雉毛奴邑

    겨우살이뿌리-麥門冬 麥冬 門冬 愛  馬  羊  烏禹  隨脂 忍陵 僕壘 雉骨木 階前草 不死草 不死葉

이와 같이 우리말로는 겨우 여섯 마디의 말이 한자어로는 육십여 개의 어휘가 되는 것이니 이러한 불경제가 세상에 어디 또 있으랴? 한 가지 어휘의 뜻을 겨우 알고 나서, 또 다른 어휘가 나오면 결국 무식쟁이 노릇을 하여야 될 것이니 이 모든 어휘를 일일이 기억하는 방법이 대체 어디 있느냐 하는 말이다.

(5) 다섯째로, 한자는 자음이 똑똑하지 아니하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推 趣 舶 肛   圄 個 腦 橙 淚 母 迫 鍮 左 取 套 覇 畵 割

따위의 글자의 음이 대체 무엇이냐 하는 말이다. 글자를 보면 뜻을 짐작할 수가 있으나 음을 읽어 보라 하면 주저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일종의 반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비교적 대담한 이는 좌우간 자기의 버릇을 따라서 또는 짐작을 따라서 아무렇게나 읽어버린다. 이것이 어찌 과학적인 문화인의 취할 바 태도이랴?

어떤 학교에 김 자일(金梓一)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 이름을 집에서 "자일"이라 부르고 학교에서는 "신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서 이 학생은 일생을 통하여 "자일"과 "신일"의 두 가지 이름으로 살게 되었다. 과연 우스운 일이 아니냐? 최 범익(崔凡翊)이라는 학생이 자기의 이름 옆에 "최봉익"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을 불러서 물어 보니 집에서도 역시 "봉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런즉 그 학생은 일생을 통하여 한자로 쓰면 "凡翊"이요, 한글로 쓰면 "봉익"으로 살 수밖에 없다. 결국 범(凡)의 자음이 "봉"이 되어 버린 것이니 이와 같이 변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느냐?

이래서는 독서, 학습, 실용 방면에 비능률적인 것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6) 여섯째로, 한자가 비능률적인 이유는 일자다음(一字多音)인 점이 있다.

    音樂(음악)      便利(편리)      形狀(형상)

    苦樂(고락)      大便(대변)      書狀(서장)

    減省(감생)      衰退(쇠퇴)      下降(하강)

    反省(반성)      斬衰(참최)      降服(항복)

    貿易(무역)      行列(항렬)      懇切(간절)

    容易(용이)      實行(실행)      一切(일체)

    差誤(차오)      善惡(선악)      停車(정거)

    參差(참치)      愛惡(애오)      電車(전차)

    殺戮(살육)      星辰(성신)      變更(변경)

    相殺(상쇄)      甲辰(갑진)      更生(갱생)

    多數(다수)      飮食(음식)

    頻數(빈삭)      饋食(괴사)

    數儉(촉고)      易食其(이이기)

이와 같은 글자를 보라. 이와 같이 한 글자가 여러 음으로 나니, 대체 어떤 때에 어느 음을 좇아야 될 것이랴? "백(白)" 자의 음과 새김에는 다음의 여러 가지가 있으니

    白川(배천)      白活(발괄)

    白魚(뱅어)      白石(한돌)

    白首(백수)      白峴(버터ㅅ고개)

    上白是(상살이)  是白齊(이삷제)

이 일자다음(一字多音)의 현상이 독서 학습의 능률을 얼마나 저하시키는 것이냐? 일음일자(一音一字) 일자일음주의(一字一音主義)가 가장 철저한 우리 한글과 이 한자음을 비교하여 볼 때에 그 표현 가치에 그야말로 천양의 차가 있는 것이다.

어찌 그 뿐이랴? 최근 40년간 일본을 통하여 들여온 한자음으로 인하여 한자의 발음이 실로 기괴장관의 형편을 이루었으니

    番地를 "반지"라 하고

    番號를 "방고"라 하고

    運賃을 "운짐"이라 하고

    昻揚을 "강양"이라 하고

    右翼을 "우욕"이라 하고

    默禱를 "목도"라 하고

    遲刻을 "지곡"이라

하는 따위의 발음을 어떻게 교정할 것인가?

(7) 일곱째로, 한자가 비능률적인 이유는 일자다의(一字多義)인 점에 있다. 표의문자인 한자로 한 글자 한 글자가 반드시 어떠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 그 특색이니만큼 그것이 만일 일자일의(一字一義)가 철저히 되었다면 그 중에도 오히려 편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수에는 제한이 있는 것이요, 뜻은 시간이 가고 문화가 진보될수록 한없이 늘어 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결국엔 한 글자로써 여러 가지의 뜻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一(일)"이라는 자에는

    하나, 처음 잠깐, 곧, 한번, 모다, 어떤,

    "上(상)"이라는 자에는

    위, 올린다, 오른다, 더한다, 존경한다, 원한다,

    "下(하)"라는 자에는

    아래, 밑, 내려간다, 내려보낸다, 내려놓다, 낮다,

    "丸(환)"이라는 자에는

    공, 알, 돈, 동그라미, 둥글다, 굴린다,

    "主(주)"라는 자에는

    임금, 주인, 어른, 주장한다, 존경한다, 앉는다,

    "乘(승)"이라는 자에는

    수레, 말, 군사, 역사책, 탄다, 이긴다, 곱절한다,

    "亡(망)"이라는 자에는

    도망한다, 멸망한다, 잃어버린다, 잊어버린다, 간다, 없다, 죽어버린다

이와 같이 복잡하게 된 것이다. 그런즉 동일한 글자로 경우를 따라서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자의 진의를 포착하기에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다.

(8) 여덟째로, 한자가 비능률적인 이유는 일어다의(一語多義)인 점에 있으니 예를 들면

    인물(人物)      1. 사람의 성질

                    2. 사람과 물건

                    3. 뛰어난 사람

                    4. 사람의 풍채

                    5. 사람의 자격

    미인(美人)      1. 얼굴이 고운 여자

                    2. 미국 사람

                    3. 그리운 임

                    4. 관녀(官女)

                    5. 재덕이 뛰어난 사람

    독어(獨語)      1. 혼자 하는 말

                    2. 독일 말

    일좌(一座)      1. 제1위의 자리

                    2. 동일한 자리

                    3. 전체의 자리

                    4. 하나의 자리

                    5. 한 차례의 강연

    운우(雲雨)      1. 구름과 비

                    2. 남녀의 교정(交情)

                    3. 은택(恩澤)

    풍진(風塵)      1. 세상

                    2. 세상ㅅ걱정

                    3. 소란한 세상

                    4. 벼슬

이와 같이 한 마디의 말에 여러 가지의 뜻이 있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독자로 하여금 말과 글의 진의를 찾기 어렵게 하는 일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한자를 대단히 비능률화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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