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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매끄럽고 평평한 벽을 타고 넘으려는 순간, 바위 한 장이 미끄러지며 돌출부에 부딪치고 나서 골짜기로 굴러 떨어졌다. 그때 돌출부에 있던 나는 바윗조각에 맞아 암벽 쪽으로 미끌어러지면서 그 밑에 있던 더 큰 돌출부까지 떨어졌다. 사고가 일어난 지점에서 약 20미터 밑이었다.
사고가 벌어진 후 생각나는 것은 여기까지다. 추락한 일은 이와 별도로 의식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이상한 의식이었다. 즉, 떨어진 것은 내가 아니었고 나는 다른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나를 닮았다. 그러니 그 사람은 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가 될 수는 없다.
그 사람은 나와 같은 붉은 색의 낡은 재킷에 혜진 초록색 바지를 걸치고 손질해야 하는 등반화를 신고 있다. 나와 같은 모습을 한 그 사람은 통바위에 달라붇었다가 "제기랄"하고 외치면서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그대로 누워버렸다. 바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골짜기 돌더미까지 굴러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추락을 목격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언제 깨어났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밝았던 것 같고 다시밝아진 듯도 하다. 시계가 박살이 났다. 나는 다시 정상으로 올라갔다.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고, 피가 나며,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나 무릎관절이 삐고 살갖이 몇 군데 벗겨진 것 외에는 다친 데가 없었다. 대피소에 돌아와서도 내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누가 떨어졌을까? 나였던가, 그 였던가, 아니면 또다른 사람이었을까?
노버트 바움게르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