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근거로 삶을 판단하는 사람과 삶을 근거로 철학을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오직 전자만이 철학자이다.
니체는 사람들이 원인과 결과를 바꿔치기해서 그 둘을 혼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인류의 고질적인
오류이고 질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단순히 원인과 결과를 바꿔치기하는 혼동이 아니라
'인과관계라는 혼동'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관계는 없다면? 모든 것이 비관계이고 어떤 지향성도 결여한 분리적인 종합이라면? 중층결정과
사후적 결정조차 없다면? 한마디로 모든 것이 상관없다면?
스피노자, 맑스, 니체,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인과관계라는 개념은 굉장히 높은 비중을 차지해왔다.
꼭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고 인류의 사고방식 자체가 그래왔던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적 철학 때문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물론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더욱 깊게 아로새겨져 있다.
현대과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카오스다. 하지만 그들은 카오스조차 인과관계로, 나비효과로
환원한다. 그들은 그저 부조리, 그저 무관한 허무, 그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고 나비의 날개짓에서 태풍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인과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혼동
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혼동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과관계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혼동인 것이다.
카오스 자체, 부조리 자체인 세계에 있어서 인과관계란 환상이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이다라는
말은 인간들의 정신적인 위안을 위해 생겨난 것이다. 아니, 이런 말조차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이말도
또한 하나의 인과관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니체, 맑스, 프로이트, 모든 사상가들은
인과관계를 형성하려는 이론가들이다. 과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또 하나의 재앙적인 개념인
목적과 수단보다는 차라리 원인과 결과가 사정이 좋다. 하지만 세계는 인간들이 그 세계에 가지고
있는 관념과는 다르게 이루어져 있고 다르게 작동하고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스피노자, 니체, 프로이트는 심리학자였다. 스피노자는 인과율의 대표적인 철학자이고 니체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인류의 고질병을 지적한 철학자이다. 프로이트는 사후성이라는, 니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원인과 결과의 위치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사후성 조차도, 여전히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즉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혼동하는 것에서는 벗어났을지 몰라도 인과관계라는
혼동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무엇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이것은 저것 때문이고 저것은
그것 때문일까. 사람들은 너무나도 관계라는 개념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관계를
세계의 주된 원리로 삼았다. 하지만 세계는 그렇게 관계라는 개념을 주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계는 부조리이고 카오스이다. 여기에는 무수한 관계뿐만 아니라 비관계가 작용하고 있다. 결국 존재
하는 것은 혼돈이다. 인과관계가 아니다. 세계는 관념과 다르다. 여러 계열과 맥락과 구조와 해석들이
세계를 가로지르지만 그건 그렇게 볼 때에만 참일 뿐이다. 관념과 실재의 괴리. 인과관계라는 환상.
스피노자는 세계의 인과관계를 모두 알게 되면 사유하게 되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과학은 바로 이 믿음에 기초해 있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인과관계를 파악했다고.
정신과학인 정신분석학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유년시절과 현재 삶의 인과관계를 추적하지 않던가.
하지만 과학이 최종적으로 발견한 것은 알튀세가 말하는 중층결정도 아니고 변증법적 유물론은 더욱
아니다. 생물학적 환원주의조차 아니다. 유전자 때문이라고? 그것은 정말로 과학적인 발상이다. 항상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 그것이 과학의 신앙이다. 그래서 과학은 최종적으로 카오스에서
나비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을 불러온다고 말이다. 그것을 현대적인 심리학
용어로 설명하자면 바로 관계망상이 된다. 과학은 인과관계에 대한 망상이다.
물론 특정한 맥락과 계열엔 부정하기 힘든 인과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볼때만 그렇게 보이
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의 맥락과 계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예를들어 내가 반복강박증을 가지고
있고 나자신을 더럽히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어린 시절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부모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그 맥락에 있어서는 참이다. 하지만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
받지 못한 아이들이 항상 반복강박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변수가 있다. 그리
고 그 변수는 측정불가능한 카오스다. 사상이, 과학이 하는 일은 그 카오스를 단순화해서 특정 맥락
으로 계열로 환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해석은 여러 이론들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고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참이라는 것을 말이다. 세계는 보는대로 보인다. 정신분석을
맑시즘을 니체주의를 포스트모던을 유전자 환원주의를 그 어떤 이론을 가지고도 하나의 맥락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세계라는 카오스에 하나의 인과관계를 만들어준다. 자본주의 때문에
부모 때문에 언어 때문에 유전자 때문에 라는 인과관계를 말이다.
그렇다면 인과관계라는 환상은 왜 인간에게 좋은 것일까. 혹은 나쁜 것일까. 좋은 점은 인과관계가
세계를 카오스에서 정돈된 단위로 재편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인지를 알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는 카오스와 부조리와 무의미와 공허, 허무를 견디지 못한다. 아무 이유도 없이
라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정신분석적 이유와 병리학적 이유 등을
들이대는 것이다. 혹은 사회심리학적 이유, 즉 집안이 가난해서 라든지 어렸을때 이지메를 당했다는
식의 이유들 말이다. 하지만 그게 진리가 아니라는 건 그런걸 주장하는 당사자들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가난한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나쁜 점은 원인을 안다고 해서 결과를 바꿀 수도 없을 뿐더러 원인을 아는게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를 바꾸는 힘은 원인을 아는 힘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스피노자는 이점에서 틀렸다. 만약 내가 원인을 알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면 지금쯤
나는 내 삶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원인을 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과 전혀 따로 노는 것이다. 반대로 원인을 몰라도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원인을 안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원인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
이라는 것. 문제 해결은 원인을 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카오스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관련
되어 있다. 이것은 정확히 스피노자와 반대되는 사고방식이다. 아는 것은 문제해결과 상관없다는 것
이다. 나에게 있어서 원인과 결과라는 것은 세계와 따로 노는 어떤 관념의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유를 주기는 커녕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한다. 인식의 힘은 문제해결의 힘과는 다르다. 물론 철학의
즐거움이 문제해결에 있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철학은 카오스라는 세계에 인과관계를 부여
하려고 하는 관계망상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