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Europe

상트페테르부르크4(Sante Peterburg)

박희욱 2013. 10. 6. 15:41

 

 

 

 

 

 

 

 

 

 

 

 

 

 

 

 

 

 

 

 

 

 

 

 

 

 

 

 

 

 

 

 

 

 

 

 

 

 

 

 

 

 

 

 

 

 

 

 

 

 

 

 

 

 

 

 

 

 

 

 

 

 

 

 

 

 

 

 

 

 

 

 

 

 

 

 

 

 

 

 

 

 

 

 

 

 

 

 

 

 

 

 

 

 

 

 

 

 

 

 

 

 

 

 

 

 

 

 

 

 

 

 

 

 

 

 

오늘이 수요일이라 오후 9시까지 오픈이었으나 피곤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오후 6시에 관람을 끝냈다.

나와 함께 캐빈을 사용했던 박군은 타고 왔던 페리에 오후 6시까지 승선을 해야 하니까

고작 5시간 남짓의 관광을 위해서 155유로를 투자하였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아니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관광거리를 뒤로 하고 되돌아서야 하는 아쉬움이 얼마나 클까.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나와서 예약해 두었던 호스텔을 찾아나섰다.

지도에 위치를 파악해 두었으므로 그 지점까지는 쉽게 도착하였는데 그 근처에서 잠시 헤메었다.

별도의 건물도 아니고, 간판이 없어서 바로 옆에 두고도 찾기가 어려웠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막상 찾으려고 하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몇몇 건물의 안쪽을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건물의 외관과는 달리 안쪽은 완전히 슬럼가 수준이었다.

건물들이 매우 낡았고, 파손된 부분이 수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된 곳도 있고, 시커먼 먼지가 덕지덕지 쌓여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다른 도시와는 차별화된 발전된 도시라는 의미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실상이 이렇다면 여타의 다른 도시의 상태는 어떠할지 짐작이 간다.

 

거리의 건물을 보아도 사회주의의 냄새가 난다. 5층 정도의 일정한 높이에다가 형태도 대체로 일정하다.

건물구조도 내력벽식이라 시원스런 창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주의 국가와는 달리 상점의 쇼우케이스가 없거나 있어도 조그맣다.

그래서 그 건물이 무슨 건룰인지, 또는 무슨 상점인지를 여행객들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상품을 진열하여 고객을 끌어들일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무척 무뚝뚝하고 친절성을 겪어보는 경우가 더물어서 무엇을 물어보기가 주저될 정도이다.

자연환경, 즉 날씨에 기인한 것인지, 제정 러시아 시절의 오랜 동안의 압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주의 시절에 훈련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북한 동포들의 성향도 이렇게 변해 있지 않을까 두렵다.

 

 

 

 일견 건물의 외관은 그럴듯해 보인다.

호스텔은 이 건물의 4층에 있다.

 

 

 

 

이것이 유일한 표지판이니 내 눈에 쉽사리 띄일 리가 없다.

 

 

4층호스텔을 찾기는 찾았으나 관리인이 아무도 없어서 한 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호스텔은 지난 시절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의 한국에서처럼 품질이 엄청 떨어지는 날림공사로 급조한 실내마감이었다.

리셉션에 있는 소파도 내버려야 할 때가 이미 지난 것이었다.

한 참 후에 관리하는 아가씨가 나타났는데 숙박료는 1박에 750루블.

 

여장을 풀고-여장이라 해봤자 조그마한 러닝용 배낭, 샤워를 한 다음에 오다가 보아둔 중국식당으로 갔다.

중국고유의 의상을 입은 러시안 웨이트레스의 표정이 무척 사무적이고 입을 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최소한의 입만 연다.

요리 2개와 수프를 시켰다. 음식이 조금 짠 듯해서 물을 요청했더니 희망과는 달리 계산에 오르는 미네랄워터 1병을 갖다 준다.

모두 다 배에 넣어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일부는 한사코 입장을 거부한다. 너무 많이 주문한 것이다.

사실 음식을 남기는 사람은 나 뿐이 아니다. 중국음식의 장점은 푸짐한 것인데 그것을 상기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부터는 요리 하나에 공기밥 한 그릇을 주문하면 되겠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대에 섰더니 800루블이 나왔다.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거금이다.

아까운 돈을 지불하는데 막상 돈을 받는 중국여자의 태도가 불친절을 넘어서 도도하다. 나는 '댕큐!'라고 말했다.

그녀의 도도한 태도에 내가 감사를 표해야 할 분위기였다.

오늘날 한국의 일본식 표피적인 친절에 식상해 하는 나이지만 이것은 너무 심했다.

일방적인 친절은 친절이 아니라 아부이다. 진정한 친절은 상호적인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지나친 상업적 친절을 달가와 하지 않지만 러시아인들의 불친절은 지나치다.

 

식당을 나와서 자그마한 수퍼에 들러서 몇가지 식품을 구입했는데 물가는 한국과 비슷한 것 같다.

 

 

7월 11일(목) 맑음

 

아침의 하늘은 쾌청이다. 어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으나 곧 잠이 들곤 했다.

모스크바에서 왔다는 룸메이트가 하나 있었는데 아침 일찍 나가버렸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호스텔 내부는 인테리어를 다시 해서 조금 깨끗하기는 했으나 무척 조악한 부실공사가 여실히 보였다.

어제 사 두었던 햄버거로 아침을 떼우고 오전 9시가 훨씬 지난 시각에 관광을 나섰다.

 

 

 

 

 

 

 

 

호스텔을 나와서 조금 가다가 은행이 보여서 현금인출을 시도했으나 되지 않았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다른 은행이 나타나서 돈을 인출하는데,

론플랜 북유럽 가이드북을 앞 은행에 인출기 위에 놓고 나온 것을 알아차렸다.

큰일 났다 싶어서 급히 달려갔는데 가이드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인출을 시도할 때 옆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자가 가져간 모양이다. 

이런 물건은 깜박 잊고 그냥 간 것이 분명할 텐데 한글로 된 그 책을 가져갈 일이 무엇인가.

선진국이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행자는 손에 무엇인가를 들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깜박했던 것이다.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고 이미 사고를 친 것이다.

 

수위가 혹시나 주워놓았는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는 그는 나를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안내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자신은 영어를 잘못한다고 했다.

나는 카드가 인출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 오해를 할까 싶어서 인출기 위에 올려 놓았던 책을 분실하였다고 분명히 말을 해주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사무실에서 나와서 인출기 앞으로 갔다. 나는 재차 놓고간 책을 분실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의심쩍어서 삼차 책을 분실한 것을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인출기 관리기술자가 전화를 받고 왔다.

그 기술자는 영어를 조금 알아들었다. 사무실에서 제법 지위가 높아보이는 그녀가 그렇게까지 영어를 못알아 들을 줄은 미처 몰랐다.

결국 책은 사라지고 말았고, 그녀는 애만 쓴 셈이다.

혹시나 싶어서 만일 책이 나타나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하고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은행을 나오니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무척 당황하였다.

이곳은 건물이 비슷비슷하고 주위에는 산도 없어서 랜드마크는 물론 방향을 잡을 지형지물이 없기 때문이다.

가이드북이 없으니까 마치 일순간 장님이 된 기분이다. 내가 걸어가든 방향을 잡는데 한 참이나 걸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서 마음을 가다덤어야 했다. 내가 상트페테부르크의 모든 곳을 보아야만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꼭 보아야 할 것은 시내관광지도를 구하여 그것에 의지해서 둘러보면 될 것이다.

조금 문제가 되는 곳은 스톡홀름 관광과 코펜하겐 광관일 것이다.

가이드북이 없으면 보아야할 곳을 빠뜨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무슨 큰 일인가.

일단 관광안내소가 있던 궁전광장에 가서 관광지도를 구하자.

 

과거에 도난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뉴욕의 펜실베니아역에서 배낭을 통채로 분실한 것이다. 다행히 중요한 것, 여권, 신용카드, 현금, 카메라만 남았다.

큰일이 날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모든 것이 없으면 없는대로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세상 모든 것은 궁즉통이다!

 

 

 

 

 

 

 

 

 

 

그리스도 부할 성당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을 모델로하여 건축한 것으로 1883년부터 1907년 사이에 건설된 것이다.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조각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