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온 글

현생인류

박희욱 2015. 8. 20. 17:46

윌슨이 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보니 미토콘드리아 DNA의 변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가장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 결과는 약 20만 년 전 인류가 한 어머니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한국인과 일본인, 티베트인, 몽골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인디언은 유전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한 묶음이고, 중국 남부인, 캄보디아인, 태국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과 함께 묶인다. 즉 북부 중국인과 한국인은 남부 중국인과는 다른 갈래에서 왔다.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브의 후예가 머나먼 동양으로 오면서 두 분류로 나뉘는 이유는 동양으로 오는 경로가 두 갈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첫째 경로는 과거 인류학에서 ‘버마 경로’라고 부르던 것으로, 아시아 해안을 따라 동으로 이동하는 길이다. 아프리카 기원설대로라면 중국 땅에 현 인류가 정착한 것은 6만 년에서 7만 년 전이다. 중국에 도달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정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일본은 1만 2,000년 전까지도 육지로 연결돼 있었으므로 중국에 도착한 사람들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는 게 무리한 추측은 아니다. 물론 일본 토착민인 아이누족은 후기 빙하시대에 배를 타고 건너간 남부 아시아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경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실크로드와 시베리아를 거치는 경로다. 한민족은 대체로 추위를 이겨내기 쉽도록 실눈이 많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동그스름한 콧날, 속 쌍꺼풀, 단두형 머리라는 체질적 특징이 있다. 대체로 바이칼 호 근처에서 사는 북부 아시아인들이 약 1만 3,000년 전에 빙하가 녹으면서 몽골 지방을 거쳐 남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일본 오사카 의과대학 교수 마쓰모토는 인간의 혈청에 있는 항체 유전자를 연구해 몽골 인종의 기원과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그는 몽골 인종을 특징짓는 네 가지 유전자 결합 중에서 몽골 인종의 혈청에 있는 Gmab3st 유전자에 주목했다. 바이칼 호 북쪽에 사는 뷰리아트 족은 Gmab3st 유전자가 100명 중 52명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인은 41명, 일본 본토인은 45명인 데 견줘 중국인은 화베이 지방이 26명, 화난 지방은 9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반면에 북극 지방에 사는 에스키모는 44명이나 몽골 인종의 특징을 보여줬다. 이 연구 결과는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멀어질수록 Gmab3st 유전자가 있는 사람 수도 줄어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므로 몽골 인종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음을 증명한다는 설명이다.

아프리카 기원설이 맞다면 인종은 언제 갈라졌을까? 1986년 마쓰나가는 두 가지 미토콘드리아 DNA 클로스터가 있는 일본인의 유전형 분포 패턴(20퍼센트와 80퍼센트)을 연구해 약 12만 년 전에 가지가 나뉘었다고 발표했다. 이들을 근거로 하면 이브에서 기원한 남 · 북 아시아인은 아주 초기에 나뉘었다가 다시 한 핏줄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이든 다지역 기원설이든 100만 년 훨씬 이전에 호모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떠났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즉 다지역 기원설도 아프리카 기원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이 현대인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기원설은 10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에렉투스가 40만 년 전에 거의 멸종하고 20만여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뒤늦게 태어난 이브의 후손들이 각 지역에 정착한 호모에렉투스의 후손을 대체하고 새로운 인종으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다지역 기원설은 어느 지역에 새로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집단이 이동해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기존 호모에렉투스 후손을 모두 몰아내고 새로운 강자로 군림한 것이 아니라 기존 집단에 포함돼 지역 특성에 알맞은 인종으로 계속 유지돼왔다고 주장한다. 호모에렉투스가 각 지역에서 멸종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고학 증거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첨단 유전자 기법으로 무장한 아프리카 기원설을 따돌리고 다지역 기원설이 힘을 받는 이유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인구밀도와 조직성이 부족해 설사 새로운 외부 침입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기존 세력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구석기시대의 인구밀도는 놀라울 정도로 낮았는데 대체로 1제곱킬로미터당 1인 이하인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각 집단은 서로 하루 이상 걸어가야 할 만큼 거리를 두고 생활했으며 구성원은 최대 50명에서 100명 정도였다. 이 인원이 넘으면 그들 중 일부가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정착한 집단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 봐야 몇몇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한 집단에 들어와서 생활할 수는 있지만 오늘날의 개념처럼 다수 집단이 몰려와 기존 집단을 완전히 절멸시키고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베이징원인은 60먄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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