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
무릅이 아파왔다.
큰일이 생기겠다 싶어서 오후 1시 30분에 걷기를 중단하고
모슬포 사우나민박에 3만원에 입실하였다.
오늘은 5시간 정도 걸은 셈이다.
모슬포 사우나민박집은 사실은 매우 낡은 모텔이었다.
모슬포 입구에 텐트를 칠만한 좋은 장소가 있었지만 오후에 들어서자 마자 이른 시간에 텐트를 쳐놓을 수는 없어서 민박집에 든 것이었다.
여장을 푼 다음에 모슬포 항구 주변을 둘러보고 늦은 시각에 점심을 취사해서 해결하고나서 푹 시는 시간을 가졌다.
모슬포항
오른쪽의 갈색 건물이 모슬포 사우나민박이다.
10월 27일(화) 흐리고 비
어제 밤에는 10시간,간밤에는 12시간 쯤 잠을 잤다.
나는 등만 붙이면 잠을 자는 체질인가보다. 물론 피곤해서 더욱 잠을 많이 잤다.
새벽에는 세차게 비가 내렸다가 아침이 되자 잦아들어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다.
주저되었지만 일단 출발하기로 했다. 안돼면 중간에서 버스를 타면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방수준비를 완비하고 출발했으나 곧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서 걸어보겠다고 나선 내가 골빈놈은 아닐지라도
골다공증에라도 걸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경험상으로 어려운 일이 부닥쳐도 막상 당하면 헤쳐나가는 것이 세상 일이다.
조금 지나자 비는 다시 잦아들었고 빗방울이 간혹 떨어지는 상태로 되었다가 오후부터 개이기 시작했다.
올레길 10번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예전에는 흔히 보았던 이런 콩밭도 요즘에 보기가 어려워져서 얼마만에 이런 모습을 보는지 모르겠다.
이 근처에서 서울에서 왔다는 직장여성 3명을 만났다.
2박3일 올레길 걷기를 하는데 오늘 귀경을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 중 한 아가씨는 보기더문 미인이었다.
그 아가씨 혼자였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촬영을 요청하였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무척 아쉽다.
내 블로그를 소개하였는데 혹시 들어온다면 사진 한 장만이라도 보내줬으면 좋으련만.
아들 하나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아내 황옥이보다는 못하지만(저의 처지를 이해하세용. ㅋ)
이쯤 어딘가 도원횟집에서 내륙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코스를 벗어나서 계속 해변길을 걷고 말았다.
도원횟집도, 올레길 표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도원횟집 지점에서 올레길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내가 꼭 올레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나는 본래 도장 찍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4대강 자전거라이딩 때도 도장 한 번 찍지 않았다.
기념으로 그렇게 하는가는 모르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도장이 없어도 내가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올레길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불쾌감이 생긴 것이다.
이 시대는 정보화시대라 한다.
정보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지만 많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정보는 욕망을 일으키고 욕망을 채워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보로 인하여 번번히 많은 욕구불만과 좌절을 겪는 시대인 것 같다.
그래서 편리한 정보화시대에도 사람들은 행복하기는 커녕 오히려 불행해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문명이란 그렇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래사장 아래로 내려가보았으나 길이 없었다.
산방산이 보인다.
70만년 전에 솟아올랐다던가.
이름이 뭐냐?
멀리 보이는 것은 형제섬
이렇게 날씨가 궂어도 걷는 기분은 좋았다.
사계해변
무릅보호대 덕분인지 통증은 사라졌다.
점심은 오한칼국수(오징어 한마리 칼국수, 8,000원)
열심히 먹었지만 끝내 다 먹지 못했다.
하멜기념관
그 시대의 네델란드 선박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멜 일행 36명은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에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그들은 서울로 압송되어서 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쳐져서 사실상 억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그들중 20명이 죽고 8명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탈출한 하멜일행의 노력으로 생존자 8명도 일본으로 보내져서 종래에는 모두 네델란드로 돌아갔다.
그런데 하멜이 표류하기 전에 네델란드인으로서 한국 이름 박연이라는 사람이 먼저 표착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일찌기부터 네델란드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난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국의 표의문자 한자와는 달리 일본은 표음문자 히라카나가 있었기 때문에 서양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원인인 것으로 보아진다.
용머리 해안
배낭을 지고서 다시 되돌아나와야 하기 때문에 입장을 포기했다.
요즘 여고생들은 입술에 연지까지 바르는 화장이 허용된다고 한다.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모르겠다.
부모들이 화장품비까지 부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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