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 54세가 되든 해, 2006도에 학교를 퇴임하였다.
나는 그 자리가 퇴임자들을 위한 자리인 줄도 모르고 참석하였으므로
아무런 퇴임사를 준비하지 않은 채 단상에 섰다.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의례적인 죽은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 한!
사람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는 한!
명예퇴임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학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젊었을 때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은 바로 그 행복과 자유였습니다.
나는 29세가 되든 해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하면서
비행기 창밖으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내던져 버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보다 미래에 더 행복할 것을 기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모든 희망도 버리기로 했습니다.
내게는, 희망은 욕망이 당의정을 입은 꼴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전에는 행복이란 없습니다. 행복을 버린다면 자유 또한 버려야겠지요.
행복을 버린 것, 그리고 이른 나이 54세에 생업을 버리고 은퇴해버린 것은
소심한 나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을 버리고 직장을 버린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습니다.
버림!
행복과 자유는 그 버림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고 난 후의 텅빔이 바로 자유와 행복인 것입니다.
텅빔(空)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예수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스스로 올라갔던 것도 그 텅빔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것을 인류를 구하기 위한 행위로 보았고,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구세주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손아귀에 쥐고서는 그 손아귀는 자유로울 수없습니다.
원숭이는 표주박에 넣은 주먹을 놓지 못하고 버둥거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원숭이처럼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숭이처럼 남의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히 숨어 있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찾아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깊숙히 들어가서 찾아야만 합니다.
그것을 찾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곧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