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온 글

빠빠라기와 시간

박희욱 2009. 4. 19. 07:19

이 글은 남태평양 사모아 섬의 추장 투이아비가 유럽을 방문한 후 그 소감을 쓴 것이다.
빠빠라기라는 말은 문명인이라는 뜻으로서 본래 유럽인을 지칭한 것이지만 우리도 이제는 빠빠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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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라기는 누구나 시간의 공포에 홀려 있기 때문에,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자신이 처음으로 위대한 빛을 본 이래(탄생)로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해가 돋고 해가 졌는가를 지극히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정말로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일정한 똑 같은 시간의 간격(생일)마다 꽃을 장식하고 맛있는 요리를 갖추어 성대한 축하를 한다.

나는, 자주 '몇 살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었다.
그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모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한 나를 보고 그들은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했다.
"자신이 몇 살인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곧잘 말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리고 생각했다.
-모르는 편이 훨씬 낫다고.

빠빠라기는 시간을 되도록이면 빡빡하게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머리 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시간을 얻기 위한 이 모든 노력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빠빠라기는 시간을 이용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나로서는 그것을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다.

오오, 너희들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들은 아직 한 번도 시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없다.
우리들 가운데 시간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다면 어디 나와 보라,
아무도 시간에 불만이 없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시간이 필요치 않다.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들 일생의 종말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며,
우리에게는 아직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때가 되면, 설령 우리들이 지나 보낸 달의 수효를 알지 못하더라도,
위대한 마음께서 알아서 그의 뜻대로 우리들을 불러들여 주신다는것을.

우리들은 저 불쌍하고, 갈피를 못 잡는 빠빠라기를 미친 짓에서 구출해 주어야 한다.
시간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들은 빠빠라기의 작고 둥근 시간 기계를 때려부수고,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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