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생명이란 신의 장난인가?

박희욱 2012. 1. 4. 05:09

  

  TV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보면, 사자나 치타의 새끼들이 성체가 되어서 생식 즉,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살아남는 개체는 다섯 마리 중에서 한 마리 정도라는데.

이러한 사정은 아프리카의 원시부족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늙어서는 수렵채취 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후손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자식을 소중히 돌봄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 전에 대부분이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UNICEF에서는 기아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 살리기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모양이다.1 2

 

  그렇다면 다섯 마리 중에서 어린 시기에 죽어버리는 네 마리와 성체로 자라는 한마리 중에서 어느쪽이 더 좋을 것인가?

그 둘의 차이점은 요절하는 네 마리는 천방지축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에 속절없이 죽어버리는 것이고,

성체가 되는 한마리는 삶을 살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함과 동시에 또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고통과 함께 불안을 감수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다가 사자라 할지라도 늙어지면 아픈 몸을 지탱하다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는 쪽인 것 같지만, 

나에게는 성체로 살아남는 쪽의 한 마리는 종의 유전을 위한 생식의 임무를 짊어진 고통스런 존재인 것으로 여겨진다.

 

  느닷없는 이야기이지만 나의 성장과정을  잠시 되돌아볼까 한다.

  나는 시골마을의 방아간집 장손으로 테어났슴에도 불구하고 결코 풍족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대가족 생활(할머니 이하, 삼촌 4명, 고모 2명 - 그 중에서 막내삼촌은 나보다 2살 연하였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려움도 있었고, 여름이면 무척 더웠고, 겨울이면 얇은 의복으로 몹시도 추웠으며, 군것질은 커녕 대충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정도의 음식만을 먹으면서 성장하였다. 겨울의 점심은 주로 김치국밥이었고, 보리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렿게도 싫어했던 죽으로 끼니를 떼워야 하는 날도 제법 있었다. 그래도 그것이 당시에는 70호 남짓 되는 마을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잣집의 사정이었다. 가난해서 배를 주려야 했던 동네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아버지께서 진영농업고등학교로 전근하심에 따라서 나도 진영대창초등학교 - 노무현이가 선배이고, 그의 처제가 나의 동기동창이다 - 로 전학을 함으로서 대가족에서 분가를 하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단란한 가정의 포근함을 맛볼 수 있으려니 했지만, 그 이후로도 부모의 사랑이라고는 받아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로부터는 항상 도를 넘치는 꾸지람만 듣고 지냈는데, 주로 게으르고,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온다는 꾸중이었지만, 꾸중을 넘어서 적대감의 표현에 가까웠다.

 

  쪼들리는 살림에 남편에 대한 불만이 겹쳐서 그것이 큰아들인 나에게 쏟아진 것이지만, 애정표현을 할 줄 모르는 당신의 성품 탓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그렇게 부지런하지 못한 나에 대한 불만에서 나오기도 했으리라. 어머니로부터 두덜겨 맞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쫓겨서 도망은 많이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추운 바같에서 아버지가 오셔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던 날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어머니 당신은 까맣게 잊어버리시고 나의 아내에게 큰아들한테 한 번도 꾸중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는 집에 일찍 들어오시는 날이 별로 없었고, 내심으로는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나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아버지로부터 매맞고 자란 사람이라면 무척 부러워하겠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단 한 번 매를 맞았을 뿐이다. 그것도 '개새끼야!'하고 외치면서 도망가다가 방아간에 잡혀 들어가서 빗자루 몽둥이로 몇 차례 맞은 것 뿐이다. 그 이후로 나를 때린 적도 없었고, 공부하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그 점이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잘 하신 것이다. 즉, 무교육이 최상의 교육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무교육은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진학시킬 자신이 없어서 그러했을 것이라고 보아진다. 장남인 나에게도 인문계가 아닌 상고로 진학하라고 권하셨으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형제들의 학교 가방끈을 모두 이어면 그 길이가 우리나에서도 몇 손가락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형제는 5남1녀나 되니까.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어머니의 꾸중은 뚝 끊어졌다. 내가 몹쓸 놈은 아니라는 것을 아신 것이기도 하겠고, 고분고분 말을 들을 나이도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에 대한 불평불만은 끊임없이 들어야 했고, 그 불평불만만큼이나 아버지도 가정에 소홀하셨다. 참다 못한 나는 임지에 홀로 계시던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정말 그렇게 가정에 소홀하시다면 나는 큰아들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공갈편지였던 셈인데 아무런 답변도 없으셨다.

 

  아무튼, 나는 단 한 순간이라도 단란한 가정의 포근함을 느껴보지 못하고 성장하였고, 그 당시에는 다시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한 적도 있었다. 그런 단란한 가정생활을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내가 가질 장래의 나의 가정생활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나의 아들은 자랄 때 우리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듯해서 문제는 없었던 듯하지만, 그래도 나의 그런 불만스러웠던 성장과정이 내 자신의 성격형성에나 또는, 나의 가정 어디엔가 악영향으로 남아 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 친구들은 내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겉보기에는 그래도 시골 동래에서는 우리집이 부잣집이었고, 그 당시에는 매우 희소했던 대졸 출신의 교사 아버지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큰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 극빈층은 아니지만 도시 아이들에 비해서 상당히 가난한 층에 속한 것으로 느껴졌다. 급우들처럼 무척 입고 싶었던 기지교복을 입어보지 못하고 목면교복만으로써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제주도 수학여행도 자의적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담임선생님은 나에게는 참가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시골에서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용돈 한 번 구경한 적도 없었고, 소위 말하는 삥땅을 쳐 본 적도 없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아버지로부터 돈에 있어서는 신용을 얻어서 필요한 돈을 요구하면 몇 푼이라도 더 얹어 주셨기 때문에 굳이 삥땅을 칠 필요도 없었다. 그러한 것은 내가 유달리 정직해서가 아니라 동생이 5명이나 되는 내가 뻔한 집안형편을 알면서 어찌 불요불급한 용돈을 받아 쓸 수 있었겠는가. 몇년 전에는 용돈 한 번 준 적이 없었다는 것에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친구들 중에는 직장생활을 한던 그때가 좋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나의 경우는 반대로 나이가 들면서 점차 나의 생활에 더욱 만족하게 되었고, 조기 은퇴한 지금은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런 불만이 없다. 현재로서는 건강한 편이라서 괜찮지만 앞으로 더 늙어서 몸이 불편하면 상황이 달라질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로서는 젊은 시절이 전혀 부럽지 않다.

 

  나는 나의 육체를 떠나는 그 날이 너무 늦게 오지 않기를 바라고, 그 경험이 어떠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어릴 때 죽느냐, 늙어서 죽느냐 하는 것의 차이점은 전자는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고,

후자는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경험하면서 죽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후자가 더 낫다.

 

  위의 이야기는 모두 아래의 결언을 맺기 전에 나의 인생과정을 짧게나마 비춰본 것이다. 이 글의 결언을 맺자면,

만일, 신이 나를 다시 태어나라고 한다면 나는 결단코 거절하겠다는 것이다.

아프락삭스 신의 고향 - 빛이 닿지 않는 검은 천국3(無)에서 영면하게 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윤회를 끝내고, 시간과 공간이 없는 그곳에서 니르바나(촛불을 끄는 것)에 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지구별에서의 삶은 한번으로써 충분하다. 두번 다시 경험할 필요가 없다.

더 좋은 삶을 보장한고 해도 소용없다.

어쩔수 없이 신의 뜻으로 이 지구별에 다시 내려와야 한다면 하나의 조건을 청하겠다.

열 살까지만 살겠다고! 그리고 만일, 이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라고 한다면

유치원 입학연령전까지만 살겠다고!

 

  아무래도 생명이란 신의 장난인 것 같다. 신비스런 장난!

 

엄마! 나 꼬리하고 놀았어요!

(아기 고양이는 엄마의 꼬리라는 것을 아직 모른다)

                              

이 모자지간에는,

이것이 놀이이면서 교육이며,

훈련임과 동시에, 바로 삶 그 자체이다.

반면, 우리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삶이 아무리 재미없어도 더 오래 살기를 원하게 된다.

충분히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산다는 것은 연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1. 그들의 생명관은 육체적 생명이 곧 생명인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들이 살아남는 어린이들의 이후의 삶을 과연 생각해 볼까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아프리카인들은 슈바이처 박사를 싫어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인구가 폭발한 지금의 아프리카보다는 슈바이처 이전의 아프리카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본문으로]
  3. 나의 조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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