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Europe

바이마르(Weimar)

박희욱 2013. 8. 20. 05:06

 

 

youtu.be/8QArwKx0qyo

 

5월 17일(금) 맑음

오늘도 하늘은 쾌청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는 대기오염이 없다보니 햇빛이 나기만 하면 쾌청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과는 달리 여기는 아침의 하늘을  보고 그날의 일기를 예측하는 것은 신뢰성이 없다. 대한민국은 발전의 댓가로 쾌청한 하늘을 잃었다. 91년도에 미국을 처음 여행했을 때도 미국이 부러운 것은 무엇보다도 맑은 공기였다.

 

 

 

 

캠핑장에 도착하면 이렇게 패니어에 든 모든 장비를 꺼집어 내어서 정리를 해놓아야 한다.

 

 

 

 

 

식당

아침식사가 요금에 포함되어 있어서 모니카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 유스호스텔은 학생들을 위한 정부지원이 있는 것 같다.

 

 

 

 

 

호스텔 앞에서 Momika Rlemm(mo.mi.rlemm@gmail.com)

조금 실례를 무릅쓰고  테니스 스타 나브라틸로바를 닮았다고 했더니 그녀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발리 플레이가 환상적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좋아 한단다.

 

그녀는 독일의 서부에 사는데 동쪽 끝까지 열차로 와서 거기서부터 아이제나흐까지 라이딩을 한 다음에 다시 열차로 집으로 돌아간단다.

그녀는 독일 전국을 누비는 자전거여행 베테랑이었다.

남편하고 같이 오지 않았냐고 슬쩍 물어보았더니 없단다.

 

 

 

 

 

게르마니아 유스호스텔

학생들은 교사의 인솔하에 투숙하였다.

 

 

 

 

 

 

 

 

 

 

바이마르 성

 

 

 

 

 

탑이 멋있다.

 

 

 

 

 

 

 

 

 

 

 

내부에는 박물관이 있었으나 입장은 생략했다.

 

 

 

 

 

안쪽에서 바같쪽으로 본 모습

 

 

 

 

 

 

 

 

 

마르크트 광장

 

 

 

 

 

 

 

 

 

 

 

 

 

 

 

 

 

 

 

 

 

 

 

 

 

 

 

 

 

 

 

 

 

 

 

 

 

 

 

배회하는 단체관광객들

 

 

 

실러(Schiller)의 집

 

자신이 존경하던 괴테의 권유로 1802년에 이주해 와서 사망한 1805년까지 거주하였고, 여기서 그의 대표작 '윌리엄 텔'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에서의 '환희의 송가'로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입장료는 8.5유로

 

 

 

 

 

Friedrich Bury의 자품이 많았는데 드로잉이 뛰어났다.

 

 

 

 

 

Friedrich Schiller

 

 

 

 

 

 

 

 

 

 

 

 

 

 

 

 

 

 

 

 

 

 

 

 

 

 

 

 

 

 

 

 

 

 

 

 

 

 

 

 

 

 

 

 

 

 

 

 

 

 

 

 

 

 

 

 

 

 

 

 

 

 

 

 

괴테의 집(Goethehaus)

괴테는 174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테어나 26세가 되던 1775년에 바이마르에 초청되어서 1832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다.

그가 이 집에 거주한 것은 1782년부터였다.

 

 

괴테의 집

아무 표지판이나 간판이 없어서 바로 곁에 두고서 찾느라고 두리번 거렸는데, 왼쪽이 그 입구다.

왼쪽의 자전거는 유스호스텔을 나와서 시내를 구경하고 바로 출발하기 위해서 패니어를 부착한 상태다.

 

베토벤과 괴테

"당신이 나에 관해 괴테에게 편지할 때 나의 가장 깊은 존경과 감탄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용어들을 찾아내 쓰세요.

나 자신 그에게 내가 작곡한 '에그몬트'에 관해 쓰려고 합니다: 순전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의 시들에 대한 사랑에서 말입니다."

"나는 괴테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거에요, 그래요, 열 번이라도 죽음에 이를 수 있어요."

-베토벤-

 

내가 어떤 한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베토벤이다.

http://blog.daum.net/dibae4u/13405707

 

 

여기 괴테의 집에도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고, 문패도 없다.

담장문화, 대문문화, 문패문화 이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버려할 유산다.

 

네 자신의 둘레에 담장을 설치하지 마라.

네 마음에 대문을 만들지 마라.

네 자신에 문패를 달지 마라.

너는 '없슴'이다.

 

이슬람 사원 즉, 모스크를 보면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

모스크에는 거창한 진입도로가 없다. 그냥 골목길을 따라서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신은 거창한 어딘가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바로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담장은 물론 없고. 대문은 고사하고 볼품없는 문이 여러 개이다. 신과 나 사이에는 간막이가 없기 때문이다.

설교단이 없다. 말은 신의 음성을 듣는데 소음으로써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상은 물론이고 아무런 그림도 없고, 텅빈 공간만이 있다. 바로 그 텅빔이 신이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아무런 단이  없다. 모든 영혼은 평등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괴테하우스 리셉션

입장료는 10.5유로

 

 

 

 

 

 

 

 

 

 

 

 

 

 

 

 

 

괴테가 수집한 미술품의 컬렉션이 대단하다.

 

 

 

 

 

 

 

 

 

 

 

괴테의 집 뒤뜰

 

 

 

 

 

별도의 서고에는 책이 가득했다.

 

 

 

 

 

Joha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리스트의 집(Liszthaus)

 

1811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리스트는 1842년에 바이마르 궁정의 악사장으로 임명되어서  바이마르와 인연을 맺었으며, 1848년부터에 여기 바이마를 이주하여 1861년까지 거주하였다. 그후 몇년간 로마에서 체제한 후 다시 바이마르에 돌아와사 이 저택에서 살게 된 것은 1869년부터 그가 사망하던 해인 1886년까지 여기서 살았다.

리스트는 본래 대단한 피아니스트였으나 여기 바이마르에 와서부터는 연주자로서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작곡과 지휘, 그리고 교육자로서 활동하였다.

 

 

 

 

 

 

 

 

Franz von Liszt(1811~1886)

리스트는 미남이어서 그런지 그의 초상화가 대단히 많았다.

젊은 시절에는 연주실력과 외모, 그리고 연주무대에서의 멋진 액션으로 여성청중들로부터 오늘날의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누렸고

파리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의 데드마스크에는 크다란 혹이 많아서 매우 흉해 보였다.

 

 

 

 

 

리스트의 집은 촬영금지였으니 이것은 몰카다.

그의 집에는 그가 흠모했던 베토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나는 베토벤과 리스트의 감동적인 만남의 장면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을 소개하고 싶다.

아래는 리스트 자신의 이야기이다.

 

 

나(리스트)의 존경하는 스승 체르니(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이다)가 나를 베토벤에게 데려갔을 때 나는 열한 살쯤 되었다.

체르니는 나를 신동이라면서 베토벤에게 만나봐 달라고 몇번이나 요청하였으나 거절하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허락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페르디난드 리스의 짧은 소품 한 곡을 쳤다. 끝났을 때 베토벤은 내게 바흐의 푸가를 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평균율 피아노 곡집>에서 <C단조 푸가>를 선택해서 연주하였다. 연주를 끝낸 뒤 나는 그를 올려다 봤다. 위대한 거장의 어둡게 번쩍이는 시선은 뚫어질 듯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우울한 얼굴 위로 번졌다. 베토벤은 내게 아주 가까이 다가와선 몸을 굽히고 나의 머리에 위에 손을 얹더니 여러 번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굉장한 녀석이군. 진짜 개구쟁이야!"

불현듯 나는 아주 용감해졌다. "이제 선생님 작품을 한 곳 쳐도 돼요?" 나는 대담하게 물었다. 베토벤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C장조 협주곡>제1악장을 연주했다. 끝났을 때 베토벤은 두 손으로 나를 잡고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는 몹시 다정하게 말했다.

"넌 행운아야! 많은 사람들에게 너는 기쁨과 행복을 줄 것이니 말이다! 그 이상 더 훌륭할 수는 없지, 최고야!"

대충 이런 이야기를 리스트는 깊은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주었다..눈에는 눈물이 가득고인 채,

행복에 찬 따뜻한 울림이 이 단순한 이야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깐 침묵한 뒤 리스트는 다시 말했다.

"이 사건은 나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지. 예술가로서의 전경력에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할까.

이 일화를 나는 아주 드물게 밖에는 얘기하지 않아. 오직 좋은 친구들에게만!"

 

이 일화는 리스트가 얼마만큼이나 베토벤을 흠모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베토벤의 스승 살리에리로부터 작곡을 배웠으니 두 사람은 인연이 깊다.

리스트는 베토벤 교황곡 9곡을 모두 피아노곡으로 편곡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쉽지 않던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향곡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리스트에게는 40년 동안 작곡했다는 모음곡집 '순례의 해(The years of pilgrimage)'라는 것이 있다. 그 모음곡집 서문에는 바이런의 시를 인용해 '나는 나 스스로 살지 못한 채, 내 주위의 일부가 돼 버렸다'라고 씌어져 있다고 한다. 당대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았고, 음악사에 작곡자로서 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자로서 대단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 왜그런  말을 하였는지는 언뜻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화려하고도 밀도 있는 삶을 꽉차게 살아도 진정한 자신의 자아를 찾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가 신부복을 입은 것도 그 때문인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는데, 알고보니 세상이 바로 나였다'라고.

梵我一如!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리스트의 곡은 피아노 모음곡 위안(consolation)이다. 무한한 위안과 함께 평화와 아름다움을 주는 곡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거리

나는 릴케의 서간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 본 적이 있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하여 그 젊은이에게 홀로 내면의 세계로 깊이 침잠할 것을 적극 권하고 있다.

예리한 이성으로 외면세계를 아무리 깊숙이 파들어가도 거기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란 내면세계의 깊숙한 곳에 있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국민극장

1919년 이 극장에서 소집된 국민회의에서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독일 최초의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그 헌법은 세계헌법의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내가 이 도시에 흥미를 느낀 것도

학교에서 배운 그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와서 보니 그저 평범한 건물이었고 실망한 나는 그냥 지나쳐버렸다.

 

 

 

 

 

 

 

 

 

 

 

도합 3유로

 

 

 

 

내 입에는 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