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촛불

박희욱 2019. 10. 18. 03:11





어제 마트에 갔다가 견물생심으로 양초를 하나 사보았습니다.

원체 분위기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 의외스러운 일이지요.

집에 와서 촛불을 켜보니 생각보다 훨씬 어둡네요.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예전에  창원공단이 되었고, 지금은 도청소재지가 된 창원군 창원면 사화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고향에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1968년께지요.

그래서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

오늘 보니 어떻게 그런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볼 수 있었는지 너무나 까마득한 일로 느껴지는군요.


책상도 없는 방바닥에 업드려서 호롱불밑에 졸면서 책을 보다가 불이 붙어서

엉겹결에 집어들어서 마당으로 내던졌던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다행히 지리책이었습니다. 자칫하면 집을 태워먹을 뻔하였던 일입니다.

그 뿐입니까, 역시 졸다가 호롱불 뒤에 개어 놓았던 이불이 불에 탄 적도 있었습니다.

두꺼운 솜이불이라 겨우 불씨를 끄고, 어른들이 볼세라 황급히 집뒤에 숨겼던 일도 기억납니다.


그런 옛일을 돌이켜 보면 잇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옛말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어두운 곳에서 어쩌다가 촛불을 켜는 경우는 온 방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만,

그때는 그 촛불조차 마음대로 켤 수 없는 형편이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51년 전의 일이군요.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다행스런 지도자를 만나서 온 나라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별로 공헌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대한민국은 이제 외형적으로는 거의 선진국 수준에 이러렀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문턱에 선 오늘날에 와서 그런 사람들에게 적폐라는 이름을 붙여서 심하게 폄하하고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역군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민주화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줄기차게 다리를 걸고 욕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지도적 위치에 서고 보니 어떠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로부터 적폐보다 더 적폐스런 모습을 봅니다.

나도 옛날에는 경제발전의 주역들을 적폐적 모습으로 보기도 했습니다만,

이제 와서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더 적폐스런 모습을 보고나니

옛날의 적폐는 적폐도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그토록 외치던 민주화는 자신들의 이익에 불과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내 경우를 보면, 사람은 살아 봐야 제대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싫어했거나 증오했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제 와서 보니 긍적적으로 바뀌었고,

내가 좋아했거나 존경했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제 와서 보니 부정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현시대의 지도자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 또한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평소에, 내 스스로  사람을  잘 볼 줄 모른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역사적 인물 또한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옳은 것은 모두다 옳고, 그른 것은 모두다 그른 것이 아닌 모순적인 것이 이 세상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일입니다. 이제사 뒤늦게 철이 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019년 10월 18일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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