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모르긴 해도 20세기에 최고로 주목을 받은 소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나는 시청하지 않았지만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연극무대에도 많이 올려진 것으로 안다. 노벨 수상자 알베르 카뮈도 자신이 노벨상을 받을 것이 아니라 카잔차키스가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나는 소설은 전혀 읽지 않는다. 대개의 소설은 만화와 함께 대중들이 즐기는 분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읽은 것은 오쇼 라즈니쉬조차도 조르바를를 자유인의 전형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어보니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번역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다른 번역본을 구입해서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조르바는 나이 60이 넘은 노인인데, 거칠고, 막무가내이고, 천방지축인 인간인 것으로 보였다. 윤리도덕에 괘념치 않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좋다. 나도 윤리도덕은 미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지팡이쯤으로 여기니까. 이 소설을 읽은지가 꽤 오래 되어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기억나는 것은, 물레질 하는데 손가락이 걸린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린다든가, 자식이 죽었는데 춤을 추었다라든가, 회사가 망했는데 춤을 춘다든가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인간이 슬퍼할 줄 모르다니! 카잔차키스는 슬픔도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재료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결코 춤추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다.
모르긴 해도, 최소한 나로서는 조르바가 과연 진정한 자유인인지 모르겠다. 내 견해로는 도리어 인생의 실패자로 보인다. 그는 나이 60이 넘어서 집도 절도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떠돌이다. 오늘도 그는 노구를 이끌고서 어느 과부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잘 것인지를 궁리하면서 거리를 배회할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조르바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서 실존주의적인 자유인의 전형을 그려내려고 했지만 나의 견해로는 결코 바람직한 자유인이 아니라 혐오스런 인간이다. 조르바는 알베르 카뮈의 또 하나의 이방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