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가는 길 811

정견(正見)

불교의 八正道의 첫 항이 正見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사물을 바로 본다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일까? 세상은 음과 양으로 되어 있다고 보지만 실재로는 하나이다, 즉 不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을 이원성으로써 본다. 이를테면,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으로 구분한다. 세상 거의 모든 사물을 전혀 다른 두 개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런 사람과 다를바 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너 자신을 알라!'라고 설파했지만 자신을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찌 알 속..

인간은 만물의 영장

신은 아무 말이 없다. 신은 靈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개념어를 사용하여 말을 한다. 신은 말로써 시끄러운 인간과 동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한 것이다. 과거 한 때, 신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부수고, 언어를 파괴해서 소통을 불가능하도록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 개념어가 없는 동물은 낙원에 그대로 남아 있다. 누군가가 말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실언이었다. 인간은 시실은 영의 卒이다. * 그 영의 졸은 이제 스스로를 AI로 전락시켜서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지구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 인간이 종말을 맞이하고나면 그때 지구는 다시 재생될 것이다.

참나

인간들은 테어나서는 몸이 자신인 줄로 안다. 성장하면서 마음, 곧 생각이 자신인 줄로 안다. 몸과 생각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즉, 죽게 되어 있다. 사실, 시간은 마음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도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이용하는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용하는 도구를 자신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 도구는 반드시 유통기한이 있다. 다른 비유를 하자면, 몸과 마음은 반려동물과 같다. 아무리 반려동물이 소중하다고 해도 동물은 동물이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것은 마치 반려동물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반려동물에 휘둘려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진정한 나, 즉 참나는 몸과 마음 너머에 있다. 그 참나는 ..

To be or To have!

사람들은 소유를 중히 여기나 진정으로 존재할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존재하는 것을 화초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유하는 것은 그 화초의 꽃을 따서 손아귀에 쥐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그렇게 소유하느라고 인생을 허비하고 만다. 존재형 인간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성취할 것도 없고, 상실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소유형 인간은 불안하다. 무엇을 성취해야만 하고, 또 성취한 다음에는 성취한 것의 상실을 염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

인류문명에서 철학이 발생한 이후, 수많은 천재적인 지성을 가진 철학자들이 수많은 문제들의 해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해결한 문제들만큼이나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철학의 문제들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결국 철학은 인간들의 지성을 엄청나게 소비했슴에도 불구하고 여지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철학처럼 인간의 마음 또한 끊임없이 문제들을 양산한다. 결국 철학과 마찬가지로 마음으로써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마음은 문제를 먹고 사는 생물과 같아서 문제를 주지 않으면 마음은 죽어버린다. 그래서 동양에서 그렇게도 무심을 설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무심은 문제가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의 삶에서 인간은 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인..

인생은 파도타기다.

인생은 달리는 자전거가 되어야 한다. 멈추면 안된다는 말이다, 앞으로 계속 내달려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조금 달리다가 멈춰버린다. 멈춰서 로보트처럼 산다. 이를테면 주저앉아서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재미보려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일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행복이라 이른다. 행복이란 이름으로 사실상 다람쥐쳇바퀴처럼 산다. 그래서 G. 구르지예프는 인간은 로보트라고 한 것이다. 인간은 항상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한곳에 정체되면 안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탐색하면서 끝없이 성장해 나가야 한다. 인생은 파도와 같다, 파도가 움직이지 않으면 파도가 아니다. 그렇드시 인생은 움직여야만 인생이며, 정체는 곧 죽음이다. 그런것은 살아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다. 되도록이면, 큰 파..

홀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자신을 가리키는 언어 '나'를 3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 즉, 인격(personality)과 자아(self)와 참나(selflessness)이다. 보통 '나'라고 하면 자아(self)를 가리키고, 자아가 외부로 표출된 것을 인격이라 하고, 그 인격의 껍질은 벗고, 자아를 거쳐서 자신의 깊디 깊은 곳으로 침잠한 상태를 '참나'라 일컷는다. 이 '참나'는 힌두교의 용어이고, 불교에서는 無我라 이르며, 기독교에서는 자아의 모든 껍질을 벗어버리고 '참나' 에 침잠한 상태를 천국이라 이른다. 그래서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다. 행복은 바람직한, 우호적인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 어쩌면 타인의 부러움을 살 때 느끼는 감정이다. 비록, 노벨상을 수상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행복

행복은 고무줄 당기기이다. 행복은 추구할수록 멀어지고, 내버려두면 따라온다. 그래서 행복은 쫓아갈수록 달아나는 파랑새라고 한 것이다. 행복은 명소시가 아니라 암소시이다. 그래서 행복에 눈의 촛점을 맞추면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알고보면 당의를 입은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도, 노자도, 예수도 행복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