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Europe

베를린6(Berlin)

박희욱 2013. 8. 11. 08:36

 

 

 

5월 7일(화) 비 후 갬

아침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고등학생들이 계속 교대로 들어와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런 많은 학생들이 어디서 투숙을 하였는지 의아스럽다. 이 호스텔은 단체숙박을 전문적으로 받는 것 같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호스텔을 나서는데 빗방이 떨어져서 되돌아 왔다. 많은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자전거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가서 신박물관에 들어섰는데 고대 이집트와 고대 수메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집트 박물관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전시였다. 그 당시의 고대인들의 숨결이 느껴졌고 박물관내에 그들의 영혼이 서성거리고 있는 듯해서 이 박물관 입장이 후회되는 않았다.

베를린 시민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모두가 건장하고 강건하게는 보이지는 않고, 표정도 유달리 무뚝둑하거나 엄격해 보이지는 않아서 독일 게르만의 이미지와는 사뭇다르다. 그냥 우리들 아시안과 같은 갑남을녀의 표정이라고나 할까. 독일국민이라고 해서 외견상으로는 유별난 국민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역시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엘리트계층인가. 우리나라에는 민중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누구나 입만 열면 국민의 뜻에 따라서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직접민주주의를 하자는 말인가. 국민은 실재에 있어서는 민중과 다름이 없고 민중은 군중과 대동소이하다. 국민의 뜻에 따라서라는 말은 국민을 위해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국민의 뜻에 따르는 것과 국민을 위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자식을 위하는 것과 자식의 뜻대로 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듯이. 나 같은 백성은 그냥 등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인 사람들이다. 그대는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나라를 이끌어야 할 사람이다. 하루빨리 정계에 투신하기 바란다.

 

최초의 독일 통일은 신성로마제국에 의한 것이었지만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사실상 300여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것을 통일한 사람이 철혈제상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파리 대사로 있으면서 통일제국 프랑스가 부러웠을 것이고, 거기서 독일통일의 꿈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독일통일 이전의 프러시아 제상으로 발탁되었고, 국회에서 국민들에 철(쇠)과 혈(피)를 요구하였다. 즉,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무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에게 철과 혈을 요구하였다가는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지만, 이런 상상은 할 필요가 없다. 이런 말을 했다가는 백번 출마해도 당성할 가능성은 무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올바른 말을 하면 안된다. 다만, 올바른 듯한 말만 해야 한다. 정치인들의 최고의 덕목은 유권자에 대한 립스비스이다. 안그러면 살아남지 못한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독일 서북쪽 끝에 자리 잡은 것은 프러시아의 수도가 베를린이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 제국이 제1제국, 비스마르크에 의한 통일이 제2제국, 그리고 히틀러는 자신의 제국을 제3제국이라 칭하였다.

국가의 통일이 늦은 나라 즉,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이 세 나라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늦게 배운 도독이 날세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2차대전 후 독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한 때 자기네 땅이었던 영토까지 영원히 포기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폴란드에 가서 2차대전 전몰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일본은 독도까지 빼앗아 먹으려 들고 있다. 그들이 지금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나서는 모양인데 과히 걱정할 필요는 없지 싶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으로 햇빛이 닿지 않는 쥐구멍속으로 들어가려는 행태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죽었고, 히로히토는 살아남았다. 이것이 양 국가의 지난 역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원인이 아닐까 하는데, 우리쪽에서 보면, 그를 살려준 것은 맥아더의 실수였다.

 

독일을 여행해 보기 전까지는 독일에 대한 이미지는 과히 좋지 않았다. 독일 기후의 음산한 이미지도 그랬고, 독일 사람의 강철같은 차가운 이미지도 그랬다. 그래서 첫 유럽배낭여행 때는 독일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뮌헨 정도만 여정에 넣었다. 그런데 런던에서 함께 지냈던 어느 여자분은 나의 이미지가 잘못 된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3년간 간호원으로 근무했는데 정작 그때는 유럽을 여행해보지 못하고 다시 유럽여행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서 예정에 없던 독일 여행을 좀 하게 되었다. 쾰른에서 시작하여 라인강 유람선으로 코플렌 아래의 보파르 선착장까지 여행하고, 하이델베르크에서 유로파 버스를 타고서 로만틱 가도를 따라서 하일브론, 로텐부르크, 뉘른베르크, 딩켈스벨, 아우구스부르크, 퓌센, 뮌헨 등지를 여행하였는데, 그 여행후에 나의 이미지가 확연히 바뀐 나라가 독일이었다. 그때나 독일 사람들은 딱딱하게 보여도 막상 말을 걸면 친절하다는 말이 그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사실인 것 같이 느껴졌다.

그때 뮌헨 관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하우 유대인 수용소이다. 가스실, 시체 화장실, 죽은 자들이 남긴 산더미 같은 안경태 무더기, 구두 무더기 등 많은 처참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정작 나의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엄마손을 잡고 가는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의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스실로 가는 길'. 외로운 여행자의 애수까지 겹쳐서인지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많이도 삼켜야 했다.

세번째 유럽미술관여행을 했을 때는 베를린, 도르트문트, 뒤셀도르프, 쾰른,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뮌헨 등지를 여행하였는데 그때는 오직 미술관만 찾아다니는 여행이었다. 훌륭한 미술관에 수많은 미술품이 가득했고 프랑스가 보유한 미술품에 못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사뭇 놀랐다. 게다가 프랑스는 미술관이 파리에 집중되어 있는데 반하여 독일은 여러 도시에 분산되어 있었다. 아마도 독일이 본래 지방분권적인 국가여서 그러한 것 같다. 나의 얄팍한 관찰로서는 근세에 들어서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보다는 지방분권적 국가가 더 발전이 빨랐던 것 같다. 지방간에 서로 경쟁하고,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작은 정부가 훨씬 유리해서일 것이다.

 

첫 유럽여행을 떠나면서 궁금했던 것-유럽의 발전이 아시아의 발전보다 앞섰던 원인은 일찍, 유럽에 도착한 며칠 후에 깨닫게 되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트라팔가 광장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구경한 다음에 영국 국회의상당을 보고서였다. 우리의 목공예보다 더 정교한 그들의 건축물이 나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게 하였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런 엄청난 노력과 제력을 들여서 그토록 놀라운 건축물을 무엇 때문에 축조하였는가 하는 강력한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경쟁심은 질투심에서 나온다. 질투심의 앞면이 경쟁심이라면 경쟁심의 뒷면이 질투심이다.

중국과 한국은 오랜동안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봉건제도를 거치지 않았다. 유럽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수많은 국가가 인접해 있었고 그 국가도 봉건제도 아래에서 지방분권적으로 나눠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심한 경쟁을 해야만 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재력이 있다 해도 99칸 이상의 집을 건축하지 못하게 했다. 아시아의 일본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봉건제도를 거쳤다. 내가 아는 유럽과 일본에서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전쟁의 냉전이 경쟁이며, 경쟁의 열전이 전쟁이지 않을까 한다. 물론 유럽의 발전이 앞섰던 이유로서는 수많은 사항을 들이댈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원동력은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한데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본다.

 

 

베르크그륀 미술관

 

피카소의 친구 베르크그륀의 컬렉션

클레의 작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다

 

 

 

 

 

 

 

 

 

 

 

 

 

 

 

 

 

 

 

 

 

 

 

 

 

 

 

박물관 앞의 베를린 시티투어 버스

박물관 앞의 베를린 시티투어 버스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

 

 

 

 

5월 8일(수) 흐린 후 정오부터는 점차 맑아짐

오늘은 드레스덴으로 가는 날이다.

엊저녁에는 8시에 취침했는데 아침 5시 경에 기상하였다. 나는 참 잠을 잘도 잔다.

짐을 꾸려서 자전거에 부착하고 나니 오전 6시 30분.

헉! 잔차를 끌어보니 무거워서 휘청한다. 40kg 이상은 좋게 될 것이다. 빈 자전거일 때와는 전혀 달라서 핸들바의 조향이 쉽지가 않다. 익숙해질 때까지 무척 조심하고 교통신호를 철저히 지켜야겠다. 타국에서 사고가 나면 내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전거는 무거워도 앞으로 잘 나갔고, 중앙역은 가까워서 곧 도착하였는데 역사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열차 승차권은 독일/덴마크 8일 짜리 1등석 유레일 셀렉트패스로 준비하였다. 자전거가 없다면 그냥 열차에 승차하면 되지만 자전거가 있기 때문에 Reservation에 가서 자전거 승차권을 예매하여야 한다. Infomation에 물어보니 윗층으로 가란다. 잔차를 벽면에 잠시 기대어 놓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중년의 사나이 2명이 지나가면서 여기에 자전거를 두면 안된다고 하면서 두 팔목을 교차해서 말춤 자세를 보여준다. 잡아간다는 뜻이다. 불쾌하다. 내 같은 놈 잡아가 봐야 잡아가는 경찰만 피곤한 일이다.

 

엘리베이트로 윗층의 예매소에 갔더니 여성 근무자가 무척 고압적이다. 베를린-드레스덴 간의 직행이 없어서 Elsterwerda에서 갈아타야 한다는것이다. Elsterwerda는 나에게 생소했고, 직행이 없을리가 없다고 여겼던 나는 매우 당황하였다. 알고보니 직행열차에는 자전거 실을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마치 아침에 나오면서 남편한테 얻어 맞고 나온 것 같은 표정이다. 아니다. 덩치와 얼굴상을 보니 오히려 남편을 패주고 나온 여자 같다. 독일에서 불친절을 겪은 것은 이 여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독일에서는 자전거 티켓은 거리에 관계없이 5유로를 받았다. 열차의 타임스케쥴을 인쇄해 주면서 7시 32분 출발이고, 플랫폼은 3번이니 즉시 아랫층(down stair)으로 내려가란다. 아랫층으로 급히 내려가니 플랫폼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잘못 알아 들었나? 'Up stair'라고 했나? 그래서 3층에 올라갔는데 플랫폼3가 보이지 않아서 물어보니 아래로 내려가란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7시 30분. 승차를 포기하고 다시 예매소로 가서 오전 9시 32분 출발의 다음 열차로 바꿨다. 나는 down stair를 한 층 더 내려가는 것으로 알아들었는데 2개층 더 내려가야 했던 것이고, 플랫폼3는 지하층에 있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자전거는 플랫폼3에 묶어두고 윗층으로 올라가서 버거킹 햄버거로 아침을 떼운 다음에 다시 플랫폼3에 내려갔더니 라이프찌히로 가는 젊은 사람이 보였다. 그에게 Elsterwerda에서의 환승시간이 9분인데 하차하는 플랫폼과 승차하는 플랫폼이 달라서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서 그 시간내에 열차의 환승이 염려된다고 했더니 거기서의 열차는 로컬열차이기 때문에 여객을 기다려 준단다. 그에게 나의 여정을 대충 설명해주었더니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열차로 드레스덴으로 가는 날 아침 호스텔 앞에서

 

 

 

베를린 중앙역

 

 

 

 

 

 

 

승차권 예매소(Reservation)

 

 

 

 

버거킹 7.5유로

 

 

 

 

 

이렇게 큰 철도역에서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다.

사용료는 1유로.

1유로 동전이 없어서 5유로 짜리 지폐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자니 지나가던 사람이 1유로를 희사한다.

독일 사람, 띵호!

 

 

 

 

오른쪽에 보이는 엘리베이트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열차를 놓쳤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열차 플랫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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