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칼 마르크스의 생애

박희욱 2024. 8. 13. 08:43

칼 마르크스 (1818년~1883년)는 1999년도 영국 bbc설문조사에서 지난 천년간 가장 위대한 철학자 1위로 선정되었고, 2008년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독일에서 유대인 부모의 7남매 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 부모는 유대인 성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으로 시작했으나 철학과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841년도에 한번도 출석하지 않은 예나 대학교에서 약관 23세에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려고 했으나 그의 사상, 즉 자유주의와 헤겔주의 사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사학위 취득 후 1843년에 예니와 결혼하였다.

결혼후 여러나라를  쫓겨다니면서 이러저러한 신문사나 잡지사에 취직을 하거나 창간을 하였지만 대개 검열에 걸려서 폐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되는 일이 없이 독일에서 추방당하여, 프랑스, 벨기에, 다시 독일에서 프랑스로 쫓겨나기를 반복하다가 종래에는 영국의 런던에 정착하였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말성을 피워서 학생감옥에 갇히도 하였고, 몹시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이어서 친구들은 그를 두고 '사상의 창고'라거나 '이념의 황소대가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성격으로 인하여 아무 하고도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끝내 결별했다. 그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독단적인 공상가였고, 설득이 아니라 선동가가 되려고한 급진주의자였다. 1846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그를 만나 유심히 관찰했던 러시아 작가 파벨 안넨코프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말투는 항상 명령조에 가까웠고 반론을 용인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마치 환상 속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민주적 독재자의 화신과도 같았다." 

마르크스의 이런 성격은 그의 건강과도 관계가 있는 듯하다. 젊었을 때는 폐렴의 후유증으로 군역면제를 받았으며, 평생동안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선천적으로 간이 좋지 못했으면서도 술을 즐겨했다. 게다가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영양상태도 좋을 턱이 없었다. 끝내는 불면증과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진통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자식이 7명이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녀와의 불륜으로 낳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내 예니에게는 엥겔스의 짓이라고 변명을 했지만, 말년에 자신의 딸에게 실토를 했다고 한다. 그 7명중에서 성장하여 성인이 된 것은 딸 3명 뿐이었다. 아마도 영양실조에 의한 질병이 그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궁핍했으면, 자식들이 신발이 없어서 바깥에 나가지도 못한 일이 있었고, 자신도 아내가 바지를 전당포에 맡기는 바람에 외출을 못한 일도 있었다.  아내 예니는 죽은 아이들의 관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거의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6년을 대부분 빵과 감자로 연명하며 가족은 소호의 방 2칸에서 삶을 꾸려나갔고, 아이들은 몰려온 채권자들에게 "마르크스 선생님은 2층에 계시지 않아요"라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빚쟁이들을 피해 마르크스는 맨체스터로 도망해야 했고 아내 예니는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예니는 절망에 빠져서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느니 나와 아이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나는 죽은 마르크스의 무덤에 침을 뱉고 싶지만, 죽은 그의 아내 예니에게는 명복을 빌어주고 싶다. 그녀는 약혼을 파기하고 마르크스와 결혼한 것은 천추의 한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마르크스가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자신의 이종한테 생활비를 구걸하고, 아내의 친지들과 친구 빌헬름 볼프의 유산으로 마르크스의 경제적 고통은 크게 경감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사상적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도움이 컸다. 엥겔스의 물주가 되어 주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섬유공장의 자본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죽음(1881.12.2)과 장녀 예니 롱구에트(1883.1.11)의 죽음으로 비탄에 젖어 살다가 1883년 3월 영국 런던에서 폐종양으로 사망했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엥겔스에게 실토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는 자신의 사상이 공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보고,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우울증을 더욱 가중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장례식 참석자는 단, 아홉 명에서 열한 명 사이였다고 한다.

내가 칼 마르크스를 평한다면,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하고 독단적이며, 무책임한 인간이다. 그의 자본가에 대한 적개심은 자신의 가난이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내 견지로는 그는 완전히 실패한 인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이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꿈틀대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그는 차라리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더라도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노동으로써 친인척과 친구들을 착취한 셈이다. 그리고 처자식들을 노동현장에 보내서 착취를 했는지는 나도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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