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비오는 날

박희욱 2016. 10. 8. 06:09


내가 자랄 때는 비오는 날이면 아무것도 할일이 없었다.

집안에는 TV는 말할 것도 없고, 라디오도, 읽을 동화책도, 장난감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라디오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우리집에 들어온 유일의 문화기기 금성 트렌지스터 라이디오가 몇달 후 어느날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빚에 쪼들린 아버님이 팔아버린 것이었다.)

 

이럴 때는 자연히 군것질이 생각난다. 그러나

군것질 할 것도 거의 없다. 기껏해야 쌀을 볶아 먹는 정도였지만,

그것도 할머니 눈치를 살펴야 하는 어머니로서는 끝내 해주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히 지붕 처마끝에서 낙숫물이 떨어져서 연출하는 물방울이 튀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그 낙숫물 떨어지는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었고,

오늘 그때와 비슷한 것을 보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그 시절을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우리 아들이 대학1학년 때 유럽배낭여행을 가라고 권하자 냉큼 가지 않고 내년에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내가 니 같으면 날겠다, 임마!"

 

아내에게, 정말이지 나야말로 부잣집에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아쉬워 할 것은 없다. 날아봤자 높이 난 것만큼 바닥에 추락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이를테면 한량으로 굴러다니다가 지금쯤은 급식소를 기웃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재로 내가 공부한 것도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함이었다.

 

서울법대 인문계열 톱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변호사를 하고 있는 장승수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공부를 안했다면 도대체 무얼 해먹고 살았을까 자신이 없다.

 

아무튼 지나 간 일은 아무 소용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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