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가는 길 887

만물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라

존중한다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한마리 벌레라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나무 위의 원숭이도 인간보다 못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낫다.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된 이유가 바로 나무위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붓다, 노자, 예수같은 사람들은 그 의식이 나무위로 되돌아간 사람들이다.알고 보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것은 대책없는 농담이었다.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자신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만물을 존중할 줄 안다면 사랑이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토록사랑을 설교했건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차라리 사랑이라는 말은 버려라, 사랑은 실체가 없는 존중의 그림자에 불과하다.상대가 싸우는 적이라 할지라도 존중할 줄 알아..

죽음과 범아일여

태어날 때는 죽음이라는 의식은 없었다. 공간도 없었다.그래서 아주 어릴 때는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주변 가로수가 움직였다.시간과 공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은 둘다 실존하지 않는 無이기 때문이다.이런 것이 태어나서 자라면서 점점 시간관념가 공간관념이 대뇌에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는 죽음이란 없었는데 성장하면서 죽음이라는 관념이 발생하였다.그러나 내가 곧 우주다, 즉 범아일여이다.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우주 바깥은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라즈니쉬는 죽음은 최고의 농담이라 한 것이다.범아일여인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없다. 말하자면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우주의 종말을 걱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죽음을 걱정하느니 지금 이 수간의 삶을 걱정하라.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개미가..

지식

지식은 세상일에 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정형화된 사항이다그러나 세상에 그런것은 없다지식은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이를테면, 칼은 용도에 맞게 잘 사용해야 하고 잘못 사용하면 해를 끼치기도 한다그런 지식을 맹목적으로 사용하면 도리어 무지가 된다그런 무지를 취미삼아 잔뜩 수집하여 자랑스레 전시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많다.

언어와 마야

세상이 점점 혼탁해지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세상이 마야라고 한 말에 새삼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종교에 휘둘리고, 철학에 휘둘리고, 이제는 과학에까지 휘둘리고 있다.정치야 본래 그러한 것이라 말할 것도 없다.그 근본 이유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바로 언어에서 비롯된다. 언어가 곧 생각이기 때문이다.언어가 없는 동물에게는 세상이 결코 마야일 수 없을 것이다.여호와가 왜 언어를 파괴하고 바벨탑을 부숴버렸는지 이해가 간다.그것은 여호와가 인간을 구원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나는 어찌하면 언어로부터 탈출해서 무념으로 침묵할 수 있을까. 부득이 세상을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랑과 홀로

사람들은 사랑에 목말라 한다.그러나 그 사랑은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사랑은 거지가 거지에게 동냥하는 꼴이다. 사랑!어찌 그런 누추한 말을 사랑하는 이에게 쓸 수 있다는 말인가.사랑이라는 단어는 술취한 시인에게나 주어버려라. 예수의 제자들이나 알라의 제자들이 줄기차게 사랑을 설파했지만기독교의 사랑과 이슬람교의 사랑이 만나서 증오로 변했다.사람들의 사랑과 미움은 빛과 그림자의 관계다.고타마 붓다나 노자가 사랑을 입에 올린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신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신도 없고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구하지 말고 홀로가 되어라.홀로가 되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충분히 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충분히 성장한 사람만이 홀로일 수 있다.붓다가 그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