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가는 길 819

새장속의 인간

하늘을 나는 새는 작은 날개 아래 하늘 전채를 담고 있으며, 존재의 궁극적인 경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으며, 늘 기지(旣知)로부터 미지(未知)를 향해서 움직이며, 그 새는 미지의 세계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재로는 늘 미지의 것에 이끌리며, 늘 기지의 것을 버린다. 왜냐하면 일단 알고 나면,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경험을 계속 되풀이 하는 것은 명백히 어리석다. 지성적인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경험에 이끌리며, 새롭게 펼쳐지는 전망이나 비젼을 좋아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름답게 장식된 새장 속에서 안주한다. 익숙하고 안전하다는 이유로. 그 새장은 인종, 민족, 국가, 사상,이데올로기, 등이며 대개 황금빛으로 도색되어 있다. 그대는 그런 새장에서 벗어나야 한..

오쇼 라즈니쉬는 삶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삶이야말로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이며 삶 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고 했다. 오쇼가 말한 삶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이기적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생명체의 본질이다. 우리는 국가와 정부와 사회가 발전하여 우리 자신의 삶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오쇼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욕망에 불과하다고 했다. 오쇼의 말이 옳다, 인간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데 사회의 구조가 바뀐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의 삶이 바뀌겠는가. 우리는 그것이 바뀔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그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아무리 사회가 변혁이 되어도 그것은 표피적..

자신의 삶

대개의 사람들에게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노예처럼 사회에 끌려다니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사회로 돌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제다. 토마스 홉스가 말했드시 사회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그러한 사회에 책임을 돌린다는 것은 호랑이에게 몸을 맡기는 꼴이다. 자신의 목을 스스로 사회에 매달지 마라. 자신의 삶을 찾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라. 그리하면 누구에게나 자유의 축복이 내릴 것이다.

깨달음

누군가가 말했다, 인간은 로보트라고. 그렇다! 대개의 인간은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로보트처럼 작동한다. 부모, 교사, 종교인, 철학자, 사상가 등 온갖 것들에 의해서 프로그램이 주입되었다. 그래서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굴리듯이 산다. 모든 프로그램을 파괴하고 직관적으로 살아라. 윤리도덕조차도 던져 버려라, 그리해서 윤리도덕이 자발적으로 뒤따라 오도록 하라.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외의 깨달음은 거짓이다. 그리하면 무한한 자유가 쏟아지리라.

행복

사람들은 행복은 저멀리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행복은 누구나 똑같이 바라는 것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내가 그 행복을 손아귀에 넣었을 때 타인이 부러워할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멀리 있는 그 행복을 향해서 줄달음친다. 먼저 움켜쥐기 위해서. 그러나 그렇게 헐떡이며 달리는 사이에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바로 곁 강변에 널려 있었던 소소한 행복은 모두 놓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