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거림

존재계를 신뢰하면서

박희욱 2023. 2. 27. 06:18

존재계를 신뢰하면서

 

나는 산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덩어리였다

그 바위는 구러면서 자기 의지대로 길을 찾아 내려가는 줄로 여겼지만, 사실은

이 바위, 저 바위 부딫히며 경사면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저절로 굴러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강물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는 일엽편주였다

그 일엽편주는 노를 저어며서 자기 의지대로 내려가는 줄로 여겼지만, 사실은

흐르는 물길 따라 하류로 저절로 떠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대양에서 홀로 떠도는 빙산이었다

그 빙산은 표류하면서 자기 의지대로 대양을 떠도는 줄로 여겼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를 따라 이리저리 저절로 떠다녔던 것이다

 

나는 이제 대양에 이르렀으니 있는그대로의 존재계를 신뢰하면서

홀로 사지를 뻗고서 깊은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우주속으로 사라지는 그날을 기다리리라

 

 

*존재계란 사념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의 세상

'끄적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진 바람  (0) 2024.01.17
향수  (0) 2023.03.15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0) 2022.10.08
팔배개를 하고서  (0) 2022.09.23
강줄기따라 일엽편주  (0) 202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