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가는 길 889

철학자2

철학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고 질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들은 생각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생각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먹은 나머지 몸이 비만형체질이다. 그래서 그들의 몸, 즉 실존이 뒤뚱거리는 것이다. 비록 천재라할지라도 비트겐슈타인도 예외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고 했다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실존을 앞서는 것이 또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각(말)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다는데,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에 사로잡혀서 생각의 노예가 된다. 그럼으로 해서 철학자들은 진정한 자신을 상실하고 만다.

깨달음

깨달음이란 없다. 그래서 깨달음의 낚시밥에 붙들린 사람들은 계속 깨달음을 추구하다가 끝내 양파를 까는 원숭이처럼 깨달음을 내동댕이 친다 아무것도 없는 그 텅빔이 깨달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깨달음은 아무것도 없는 태풍의 눈과 같다 바람도 없고 언제나 청명한 푸른 하늘이 빛나는 태풍의 눈이다 태풍과 태풍의 눈이 별개의 것이 아니듯이 깨달음은 고해의 바다 세상의 한가운데에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철학

철학은 실존을 포장하는 일이다 그 포장지가 바로 언어다 언어는 실존을 가리는 포장지에 불과하다 유일하게 유용한 철학이란, 실존을 가리는 그 포장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이다 여호와가 언어를 파괴하고 바벨탑을 부숴버린 것은 바로 철학, 즉 사념을 제거하고 실존을 폭로하는 상징적 이야기이다 신앙은 모든 사념을 끊어버리기 위한 길이며, 그 수단이 바로 사랑이고 무심이고 무념이고 道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런 신앙조차도 철학으로 변형시켜서 간직하기 일수다 철학자들은 저마다 그럴듯하게 실존을 포장해 내놓지만 그것은 결국은 실존과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하이데거같은 철학자들은 여러 수십겹의 포장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지만 사실은 뻥이며, 그 뻥은 철학자들의 양식으로서 유용할 ..

신앙

신앙은 인간의 지나친 대뇌발달로 인한 과도한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경전이나, 교리에 빠져서 새로운 관념의 틀에 붙들린다. 그것이 지나친 사람들이 직업적 종교인들이고, 그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원리주의자들이며, 그런것을 넘어버린 사람들만이 진정한 신앙인이다. 신앙은 무념과 무심으로 가기 위한 징금다리이며, 그 징금다리를 건너면 피안이나 천국이 되고, 건너지 못하면 오도가도 못하고 징금다리 위에서 서성이는 신세가 된다. * 무심의 짐승들은 천국에 살고, 그 천국에는 신앙이 없다. 구원을 받은 사슴은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순간에도 발버둥을 칠지언정 죽음은 없으니 신앙이 왜 필요하겠는가.

인생은 파도타기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여서 이웃의 행복을 축원해 주지만, 그것은 햇빛 아래에서 그림자 없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바다의 파도는 마루와 골로 이루어져 있드시 인생 또한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파도이다 천국에는 불행이 없으니 행복 또한 없다 인생에 있어서 불행마저도 버릴 것이 없나니, 이 세상 두려움 없이 인생의 파도타기를 즐겨라

삶의 의미

하늘을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에게 물어보라, 사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그러면, 독수리는 되물을 것이다, 즉 의미가 무엇하는 것이냐고. 사는 의미를 묻지 말고, 의미의 의미조차 모르는 독수리처럼 살아라. 예수도 그런 독수리처럼 살다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니, 병들고 늙어서 죽는 것보다 낫다. 그는 의미없슴을 일러서 사랑이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