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거림 57

존재계를 신뢰하면서

존재계를 신뢰하면서 나는 산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덩어리였다 그 바위는 구러면서 자기 의지대로 길을 찾아 내려가는 줄로 여겼지만, 사실은 이 바위, 저 바위 부딫히며 경사면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저절로 굴러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강물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는 일엽편주였다 그 일엽편주는 노를 저어며서 자기 의지대로 내려가는 줄로 여겼지만, 사실은 흐르는 물길 따라 하류로 저절로 떠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대양에서 홀로 떠도는 빙산이었다 그 빙산은 표류하면서 자기 의지대로 대양을 떠도는 줄로 여겼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를 따라 이리저리 저절로 떠다녔던 것이다 나는 이제 대양에 이르렀으니 있는그대로의 존재계를 신뢰하면서 홀로 사지를 뻗고서 깊은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우주속으로 사라지는 그날을 ..

끄적거림 2023.02.27

팔배개를 하고서

스위스 취리히 호수변의 캠핑장에서 멋진 캠프홈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홀로 나의 작은 텐트를 쳤다 그러고는 풀밭에 팔배개를 하고 몸을 뉘었다 푸른 창공에 흰구름이 빛나고, 넓은 나뭇잎 잎사귀가 따가운 햇살을 살짝 가려준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미풍이 내몸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낫다 아무것도 필요없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끄적거림 2022.09.23

강줄기따라 일엽편주

내 인생 강줄기 따라 흘러온 지 어느듯 7만리 그 긴 여정 아득히 지나가버렸으니, 뒤돌아 본들 무엇하리 일편단주 조각배에 이 한 몸 싣고, 홀로 흘러가야 할 강줄기 몇리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는 운명처럼 정해진 물길 따라, 흘러 흘러 끝내 대양에 이를 터이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다만, 홀로 뱃전에 기대앉아, 물끄러미 강변풍경이나 구경할까 하노라

끄적거림 2022.03.09

법정스님

법정스님! 지금쯤 그곳에서 평안히 잘 지내시겠지요. 스님이 세상을 등지시고, 뒤늦게 산속 깊은 곳으로 홀로 들어가실 때만 해도 조금은 의아스러워 했습니다. 또, 스님이 귀천하시기 전에 주옥같은 저작들 출판을 안타깝게도 불허하신 것도 의아스러워 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러하셨던 스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어느것 하나 덧없지 않는 것이 없는가 봅니다. 덧없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의 덧없슴을 깨닫는 것 뿐이겠지요. 스님이 세상을 뒤로하고 산속 깊숙히 들어가셔서 스님 스스로 쓴 글들조차도 덮어버리려 했던 것은 세상의 온갖 말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정에서였겠지요. 아직 살아야 할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없지만, 저도 세상의 온갖 말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습니다, 제가 달아날 마지막 도피..

끄적거림 2021.07.25

어미오리

저녁을 해결하고 바닷가로 나갔다 상현달이 무척 밝아서 작은 별들은 모습을 감췄다 저녁 하늘에는 한줄기 새털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아카바만의 밤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닷물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해변의 잔자갈들을 쓰다듬는다 선선한 미풍이 나의 살결을 간지르는 몹시도 평온한 해변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어떠한 인간으로 비칠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으며, 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나는 또한 무엇을 받았으며,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외로움이 있을 뿐 그러면 나는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도리없이 무소의 뿔처름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어미오리는 새끼오리들이 무리지어 딴전을 피울지라도 결코 ..

끄적거림 2021.04.08

나의 집

나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없다 내 집 대문의 비밀번호를 몰라서일까 싶어서 아예 대문을 열어 놓아 보았다 그래도 대문을 노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되겠다 싶어서 내가 이집 저집 몇몇 집의 대문을 기웃거려도 보지만 대문을 열어놓고 있는 집은 없다 대문을 두드려 보기도 하지만 기껏해야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가 슬며시 대문을 닫아버린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은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마음을 열어 놓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나는 홀로 집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호올로! -----------------The Whole!

끄적거림 2021.03.08

봄바람

북쪽 찬기운이 내려와 코앞에 다가온 긴 겨울로 움츠려 들었던 내 마음이 어저께 같은데, 시간은 성급한 냇물처럼 흘러 광안리 갈매기 날개짓에 벌써 조급한 봄바람이 일렁인다 예전의 봄바람은 푸른싹이 돋아나고, 하늘 높이 흰구름이 솟아오르는, 가슴부푼 계절을 예견케 하였건만 오늘의 봄바람은 예전에 그러했던 봄바람이 아니다 가까이 지내던 내곁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멀어져 가고 여기 아장걸음 손주도 머지 않아 내 손길을 벗어날 터이니 나는 홀로 텅빈 가슴 안고 피안을 그리워하며 세월을 흘리겠지

끄적거림 2021.02.15

500 Miles

청운의 꿈을 안고 낭만의 대학캠프스를 거닐며 팝송 500 Miles을 듣곤 했던 것이 어언 48년 전이군요. 그러나 그 꿈은 곧 스러지고 졸업이 다가오기도 전에 헤어나기 힘들었던 절망으로 변색되고 말았지요. 그런 절망으로 시작한 내 인생은 기차를 타고 500마일씩 달려서 40여년이 지나가버렸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서 돌이켜 보니 그 절망이 내가 살아온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머지 500 마일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럴 나이도 지나버렸으니까요. If you miss the train I'm on You will know that I am gone. You can hear the whistle blow A hundred miles, a hundred miles, A hundred miles, a..

끄적거림 2020.12.29